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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살리라 |345| 건기록 열람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89) 아울러 위원회 상임단 90) 에서는 중요 사건을 제외하고 사건을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는 법에 명시된 의문사로 인용되기 위한 요건 91) 즉, 민주화운동 관련성 여부와,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적인 행사여부 중 한 가지, 특히 위법한 공권력 행사여부는 조사를 깊숙이 해서 사인의 실체관계를 확인해야 알 수 있는 반 면에 민주화운동 관련성 여부는 상대적으로 용이하므로 이를 확인하여 관련성이 없으면 기각하자는 기류였다. 92) 의문사 유가족 등은 이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를 하였으나 다소 기각결정의 시기만 늦추었을 뿐 이를 근본적으로 막지는 못하였다. 위원회 상임단이 이렇 게 판단한 이유는 주어진 기간 안에 최선을 다해 사건 처리를 하면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93) 이렇게 진상규명이 난항을 겪자 의문사 유가족 등은 원인을 위원회에 돌리기 전에 민간조 사관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7월 20일 전원회의를 소집 96) 하여 각성 을 촉구하는 한편, 9인위원회 95) 를 구성하여 조사관들을 직접 지휘하고 있는 과장단 96) 에 대해 2개월가량 여러 각도에서 평가 작업을 벌렸다. 그 결과 과장 2인에 대해 지휘 책임을 물어 위원회에서 소환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의문사 유가족 등은 이러한 결론을 9월 27일 상임단에 요청하였는데, 상임단은 이를 거 부하고 9월 29일 조사3과장과 특별조사과장의 보직을 맞바꾸는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 |344|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서에 사실관계만 적시하고 판단은 위원회에서 한다고 지시하였다. 두 번째 논란은 사건 조사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파견 공무원들은 익숙한 관성 83) 대로 사인만 조사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민간 조사관들은 의문사 사건의 성격상 사건의 배경까지 함께 조사해야 한다고 대립되었다. 이 문제도 상당기간 동 안 논란이 되었다. 파견 조사관 중에는 배경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일도 발생하였 다. 84) 결국에는 위원회에서 배경조사까지 하기로 결정하였지만 상당한 진통을 겪고 나서 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건 조사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조사역량이나 열의 와 연관된 문제였다. 민간 조사관들의 경우 길게는 10개월 가까이 훈련을 쌓았지만 실전 경험이 아니었기에 적지 않은 경우 실제 조사에서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85) 반면에 실 전 경험이 많은 파견공무원들도 적지 않은 경우 몸을 던져 진상규명에 매진하려 하지 않았 다. 의문사 사건들 중 그나마 준비를 하였던 최초 진정사건들도 대부분 성과가 들어나지 않고 있었다. 86) 또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는 위원회 운영과 관련된 문제였다. 공조직의 특성도 작용하기 는 하였지만 운영과 관련하여 폐쇄성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87) 의문사 유가족 등에게 사건 진척 상황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물론 88) , 비상임위원들에게까지 주요 정보를 차단하고 사 83) 수사 현장에서는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실체관계만 조사하지 배경 등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는다. 84) 단적인 예로 강제징집 되어 녹화사업 과정에서 사망한 사건들에 대해 파견 공무원들 중에 녹화사업에 대해서는 조사를 거부하겠 다는 일이 2001년 11월까지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연합뉴스는 2001.11.31 보도에서「의문사 진상규명위 내부갈등 심화」「이달 초 열린 조사3과 회의에서 과거 운동권 학생들의 프락치 활용의혹을 받고 있는 소위“녹화사업”에 대해, 김학철 3과장이 당시의 사회∙정치상황 전반을 포함한 철저한 조사방침을 밝힌데 대해 기관파견 조사관들이“사망 전후의 행적과 사인 등만 규명하면 된다”며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85)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합리화 경향이 나타났다. 조사권한 등의 부족을 타개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거나, 자신의 조사 역량 부족을 극복하려 하기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짓게 나타났다. 이는 자신이 조사한 내용에 대해 스스로 별다른 의심 없이 맞다고 생각하였으며, 진술들 중 다수결에 따라 결론으로 채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적인 예로 정연관 사건을 담당하였던 민간조사관의 경우, “100명을 조사해서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당시 헌병대 조사내용과 같이 단순 구타사망이라 진술하는 데 그게 진실이다”라 고 주장하였고 그에 띠라 기각으로 처리되었으나, 2기 위원회 조사과정에서 1기 위원회 조사시 단순구타라 진술하였던 핵심 관계 자들 모두가 단순구타가 아니라 군부재자투표와 관련하여 구타 사망하였다고 진술하여 실체 관계가 밝혀지게 되었다. 86) 이는 처음부터 예견되었던 일로서 파견공무원들의 경우 친정기관이라 할 수 있는 기관과 관련된 조사에 파견 기간이 종료되면 복귀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며, 나아가 조사 진척상황을 파견 기관에 보고하다가 적발되어 복 귀되는 일도 있었다. 87) 파견공무원은 조사를 담당하고 있는 수사기관 파견 공무원 외에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파견 공무원이 있는데, 당시 행정과장이 위원회 운영 기류에 상당한 정도로 부정적인 작용을 하여 2001년 9월 14일부터 19일까지 사무국장이 행정과장의 인사쇄신을 요 구하며 출근하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 88) 2001년 6월 4일 의문사 유가족 등은 종로경찰서 기자실에서 의문사 조사과정의 투명성과 공개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6월 9일까지 위원회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였다. 89) 위원회 초기에는 이러한 경향이 무척 심하였으며, 전반적으로 상임단이 비상임을 소외시키는 일이 많아, 위원회 회의에서 대개의 경우 상임단과 비상임단의 대립구도가 형성되곤 하였다. 90) 위원회에서 상임활동을 하는 위원장, 제1, 제2 상임위원 91) 이 문제는 의문사 진상규명이라는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입법 과정에서 잘못 만들어진 것으로서, 자살이던 타살이던 죽음의 실 체 관계와 왜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알고자 하는 의문사 유가족들은 물론,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위원들까지도 내내 괴롭 게 만들었던 문제였다. 92) 이 문제가 표면화 된 때는 2001년 7월 12일 열린 고정희 사건 중간 설명회에서였다. 93) 의문사법은 2001년 6월 28일 1차 개정이 있었는데, 조사기간을 6개월 연장하고 과태료 부과권자를 위원회로 하는 내용이었으며, 상임단의 흐름은 더 이상의 개정은 없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상임단 내에서도 입장의 차이가 있었는데 민 간 출신인 위원장과 제1상임위원은 법개정을 하지 않고 기간 내에 끝내자는 입장인 반면에, 공무원 신분인 제2상임위원의 경우 법개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94) 민간 조사관들은 이날 전원회의가 소집되기 전에 여러 방법으로 자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모두 실효를 거두 지 못한 상태였다. 95) 의문사 유가족 3인, 단체 3인, 민간조사관 3인으로 구성 96) 민간에서 참여한 조사과장 3인과 팀장 1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