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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살리라 |315| 1-2-2. 입법을 위한 준비 의문사 진상규명운동은 김영삼 정권 중반기까지는 진정과 청원 운동으로 전개되다가 김 영삼 정권 후기인 1996년 하반기부터 전환을 모색하게 된다. 37) 의문사 유가족 등은 그동안 진행되어 왔던 열사들의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 운동을 재검토한 결과 의문사 진상 규명을 이뤄내는 일은 정치 사회의 역관계뿐만 아니라 의문사를 야기한 법적∙구조적 문 제가 결부되어 있기에 이를 청산하는 운동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단 시일 내에 이를 해결하려 하는 조급성을 지양하고 중장기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꾸준히 전개해야 하며, 아울러 단순한 구호 차원이나 감성적 차원에서 벋어나 논리적 토대를 이뤄 내고, 이를 통해 입법화하여야 한다는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방침 하에서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매년 3차례 정도의 학술회의나 공청회를 개최하여 이론적 근거들을 확보하였다. 여기서는 학술회의 등에서 다뤄진 내용 중 의문사 해결 방향에 대해 몇 가지만 언급해 본다. 1997년도에 처음으로 개최된 학술세미나에서 토론자로 나왔던 장기표 38) 는‘포괄적 청산 론’을 제안하였다. “ …고난과시련으로점철된군사독재시절의부정적유산들에매달려민족사전진의기회를놓쳐 서는 안되겠다. 과거를 과감하게 청산함으로써 미래를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기위해서는군사독재기간탄압한사람과탄압당한사람이새로운전진을위해화해할필요가 있겠다. 전두환씨와노태우씨의구속은당연한것이지만그두사람을구속한다고해서역사가바로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두 사람을 구속하는 일로 군사독재에 영합했던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고있으니이것은역사를거꾸로세우는것이될수있다. |314|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규명 좌절로 겪은 후유증 34) 으로 상당기간 동안 의문사 진상규명 투쟁을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였던 관성적 요인, 그리고 가장 결정적 요인으로 국민청원제도에 대한 순박한 기대가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우선 그 시도는 1993년 4월 13일 허원근 등 군의문사 사건 11건에 대한 진정서를 국방부 특감단에 제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93년 5월 1일 노동절 행사를 기점으로 하여 의문사 전면재조사촉구를 위한 대국민서명운동을, 1994년 11월 4일 의문사 진상재조 사 촉구를 위한 10만 여명 35) 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 36) 할 때까지 전개하였는 데,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집회는 물론이고, 울산 현대자동차 앞에서 서명을 받는 등 전국 을 순회하며 서명운동을 벌였으며, 심지어는 캐나다를 비롯한 해외 교포들의 서명까지도 조직하였다. 그리고 1995년부터 1996년에는 국민고충처리위원회와 청와대에 허원근, 우 종원, 정경식, 김성수 등 13건의 의문사를 진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느 진정이나 청원도 정부와 정치권은 귀 기울여 주지는 않았다. 국방부 특감단 에 제출하였던 진정은 관할 수사기관에서 확인한바 이상이 없다는 회신이 왔을 뿐이고, 국 민고충처리위원회에 낸 진정은 허원근 사건에 대해서 자살로 보기 어렵기에 재조사하라고 육군본부에 이송하였다는 회신이 왔으나 그 이후 감감 무소식이었으며, 국회에 전면재조 사 촉구를 위한 청원은 한 번도 다뤄지지 않은 채 1996년 5월 29일, 14대 국회 회기 종료 와 함께 자동 폐기되어 10만 여명의 서명 용지는 폐지공장으로 가고 말았다. 다만 이 과정에서 얻은 성과가 있다면, 이 진정 청원 과정을 주도하였던 허영춘님이 스 스로 법의학을 공부하고 5공 특위 과정에서 입수한 의문사 사건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34) 5공 특위에서의 진상규명 좌절로 겪은 후유증은 의문사 유가족들에게 상당한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을 가져 왔다. 그동안 개별적 으로 진상규명을 위해 쫓아 다녔으나 그것이 성과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데다, 집단적인 투쟁을 장기간 계속하면서 집단적 자신감 이 형성되었고, 여소야대라는 정치적 고양기에 실시된 특위에서의 청문회는 의문사 유가족들로 하여금 상당한 정도의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던 것이 아무 성과 없이 막을 내리게 되자 급격한 허탈감으로 작용되어, 1990년 11월 12일에는 이 이동 부친이 의문사 유가족들과, 대통령, 국회의장에게 각각 의문사 진상규명을 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고, 1991 년 3월 6일에는 최우혁 모친이 아들을 군대에 보내어 의문사 당하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으로 실어증에 시달리다가 한강에 투신하 여 운명하였다. 35) 거대한 조직체를 갖지 않은 상태에서 10만 여명의 서명을 일일이 받는다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의문사 유가족 등은 마치,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의 서명이라도 받지 못하게 되면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심정으로 이 서명운동을 전 개하였다. 36) 청원 소개의원으로는 이부영 의원 외 91명의 의원들이 참여하였다. 37) 이 시기부터 1993년에 발족하여 그동안 유가협을 중심으로 한 합동추모제를 치루는 행사를 실무적으로 진행해 온‘전국민족민주 열사 추모(기념)사업회 연대회의’가 처음으로 상근 활동가들이 결합하여 상근조직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동안 유가협의 보조적 인 역할을 수행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또 다른 주체로서 의문사 유가족 등과 화학적 결합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38) 당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