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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살리라 |313| 투쟁은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30) 그러나 비록 목표를 달성하는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으 나, 의문사 진상규명 투쟁을 겪으면서 의문사 진상규명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로 민주화 운동 세력 내에서나 정치권, 그리고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다는 점과, 의문사 유가족 등이 단순히 피해자의 차원을 벋어나 민주화운동 세력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는 점이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2. 김영삼 정권 시기의 진상규명 청원과 입법 준비 1-2-1. 진정과 청원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의문 사 유가족들은 김영삼 정권시기에 청원 31) 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정치권을 압박하여 진상 규명을 이뤄내는 방안을 시도하였다. 이렇게 방향을 설정한 이유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작용 하였는데, 첫째,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부터 김대중 총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 문사 진상규명에 소극적으로 대하였던 것을 피부로 느껴왔던 경험에서 비롯된 직접적 요 인이 하나 있었고 32) , 둘째, 김영삼 정권의 성격 규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로 민주화 운동 세력들이 모색 단계에 있었던 요인 33) , 그리고 셋째 요인으로는 5공 특위에서의 진상 |312|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이러는 과정에서 의문사 유가족들은 국회에 설치된 5공 특위에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 하였는데, 1989년 2월 국회는 이를 수용하여 특위에서 각 기관에 의문사 사건 수사기록 등 자료를 제출하라 하였고, 정연관 사건의 경우‘양대선거 부정조사 특별위원회’에서 청문 회를 열기도 하였지만 조직적인 위증으로 그 진상을 규명하지 못하였다. 25) 우여곡절 끝에 5공 특위에서 의문사 사건들을 다루기 위한 일정이 잡혔으나, 가해자가 출석하지 않고 TV 에서도 중계를 하지 않는다고 하여 의문사 유가족 등은 이를 거부하였다. 26) 이렇게 5공 특 위에서 의문사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노태우 정권이 검찰을 통하여 일부 관 련자들을 구속 수감하는 선에서 5공청산 문제를 정치적으로 매듭을 지으려하는 기류가 일 어나자, 의문사 유가족들은‘의문사 해결없는 5공청산 기만이다’라는 구호아래 전민련에 서 농성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7) 그러나 1989년 12월 31일 온 국민이 TV를 통해 청문 회를 지켜보는 가운데, 전두환이 5공 특위 28) 와 광주 특위 29) 의 연석회의에 출석하여 1백25 개 항목의 서면질문에 답변했으나 시종일관 변명으로 일관하였고, 특히 1980년 5월 22일 자위권 발동의 불가피성을 거론하자 회의장 및 방청석이 극도로 소란한 가운데 회의진행 이 곤란하여 이기택 위원장이 정회를 선포하고 전두환 출석이라는 모양 갖추기만 한 채 사 실상 특위활동이 종료되었다. 이어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1월 3일 특별성명을 발표하여 5공청산 작업의 종결을 선언했고, 1월 22일 청와대에서 민주정의당 총재인 노태 우 대통령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는 삼당 합당을 선언하기 에 이른다. 이로서 의문사 진상규명을 국회 5공 특위를 통해 이루려던 의문사 유가족들의 25) 2004년 7월 14일 위원회는, “1987년 12월 단순 군기관련 폭행으로 사망하였다던 정연관 상병이 군부재자 투표시 여당지지 및 비밀투표 방해 등의 선거부정행위와 관련 야당 기표자 발생에 따른 구타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국회 청문회과정에 서도 헌병대 수사 내용대로 위증을 하라고 압력을 가한 사실도 밝혀졌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26) 당시 5공 특위 이기택 위원장은 의문사 유가족 등의 이 같은 거부 의사에 대해, “그래도 특위에서 이 문제를 다루게 되면 속기록 에 남게 되어 훗날 중요한 근거로 삼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였다 한다. 27) 1989년 12월 11일 전민련에서 농성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농성 장소를 선택한 문제가 아니라 민주화운동 세력들에게 의문 사 진상규명 문제를 매듭짓기 전에 투쟁을 끝내지 말라고 촉구하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며칠 후인 1989년 12월 15일 노 태우 대통령,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는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전두환 국회 증언, 정호용∙이희성 공직 사퇴 등 11개항을 이행하는 선에서 5공청산을 합의하였다. 28) 제150회국회 임시회 중인 1990년 7월 5일 제38차 제5공화국에있어서의정치권력형비리조사특별위원회는 강신옥 위원(민주자유 당, 조사보고서작성소위원회 위원)으로부터 조사보고서작성소위원회의 특위조사결과보고서작성에 관한 보고를 들은 다음 여당인 민주자유당소속위원만 참석한 가운데 이 조사보고서를 이의 없이 특위안으로 채택하였다. 29) 이 특위는 여∙야의 의견불일치로 특위조사결과보고서를 채택하지 못하고 1992년 5월 29일 제13대국회 임기만료로 소멸되었다. 30) 국회 5공 특위에서 얻은‘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는데, 우선 5공화국 당시 발생한 신호수, 우종원, 김성수 등의 사건들과 허원 근, 최우혁, 정연관, 김영권, 박필호, 박상구, 등의 군 의문사 사건, 김두황, 정성희, 최온순, 한영현, 한희철, 이윤성 등 녹화사업 관 련 사건 기록들이 제출되었고, 정연관 사건 청문회에서는 허위 진술한 기록들이 남아 이후에 의문사진상규명을 하는 데 유용한 자료로 사용될 수 있었다. 31) 국민이 국가기관에 대하여 일정한 사항을 문서로서 진정하는 것. 민주정치는 국민을 위한 정치이므로 국민은 국가기 관에 대하여 일정한 희망이나 의사를 제출함으로써 권리의 구제, 위법의 시정 또는 복리증진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다. 고전적 기본권의 하 나이며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 권리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헌법도 이를 보장한다(헌 26). 국회에 대한 청원은 국회법 (123~126), 지방의회에 대한 것은 지방자치법(65~68), 그 밖의 일반법으로는 청원법이 있다. 32) 의문사 유가족들에 따르면 기독교회관에서 농성하던 당시, 5공 특위에서 의문사 진상규명을 해 줄 것을 촉구하기 위하여 경상도 출신 유가족들은 김영삼 총재 집으로, 전라도 출신 유가족들은 김대중 총재 집으로 각각 나누어 들어갔는데, 한 쪽에서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이에 대해 흔쾌히 수락하였으나, 다른 한 쪽에서는 귀찮은 존재로 취급하였다 한다. 그리고 유가협 건물 구입을 위 하여 서화전을 열었는데 한쪽에서는 총재를 비롯한 소속의원들이 적극적으로 이를 구입하여 주었으나, 다른 한 쪽에서는 완전히 비협조적이었다고 한다. 33) 김영삼 정권 초기 상당기간 동안 민주화운동 세력은 오랜 군사정권 시대를 벗어났으나 민자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 정권의 성격 규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으며, 그러는 동안에 변변한 집회 한 번 개최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