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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08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열두 살 때 3∙1 운동에 참가하였다. 경찰 주재소를 파괴하였던 동지는 일본 헌병에 붙잡혔지만, 나이가 어려서 매만 맞고 풀려났다. 이때 동지의 내면에 뿌리내린 민족자존 의식이 한평생 독립운동과 통 일운동으로 이어졌다.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40년 6월 중국으로 망명했다. 동지는 마카오에서 사업에 성공해 탄탄한 재력을 갖춘 뒤, 임시정부 마카오 연락 책을맡았다. 임시정부에독립자금을보내고, 중국의일본군동태를보고했다. 해방직전 귀국하여 활동하던 동지는 일제에 구속되어 수감중 ’85년 8월 16일 감옥을 나왔다. 해방 정국에서 동지는‘남북 통일이 없으면 우리 민족은 진정한 독립을 이룬 것이 아니다’라는 백범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광복 뒤 조선 최대의 성냥 회사를 경영해 남한에서 몇 손가락에 안에 꼽힐 정도로 부자였던 동지는 한 국독립당(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 및 재정부장을 맡았다. ’48년 4월 동지는 단독 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남북협상을 위해 백범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 다. 이후에 백범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이승만 정권에게 사업체를 빼앗기고 정치 활동이 묶이는 등 가시밭길을 걸었다. 동지는 평화통일정책에서 백범을 계승한 죽산 조봉암을 도와 진보당 재정위원장을 맡았다. ’59년 7월‘진보당 사건’에 연 루돼 옥고를 치른 동지는 ’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자 혁신계 인사로 분 류돼 다시 수감됐다. 이후 동지는 반독재와 통일운동의 길을 걸었다. 80년대와 90년대에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활동 등을 통해 각종 집회와 시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등 민간통일 운동의 맨 앞자리를 지켜왔고, ’03년 12월 공개유언에서“하루 빨리 통일을 되기 를 바란다.”고 밝혔다. 동지는 ’05년 3월 5일 통일을 보지 못하고 운명하였다.(2005. 3. 6 한겨레 기사 발췌) 동지는 생전에 저서「가시밭길에서도 느끼는 행복」을 1997년에 발간하였다. 끝내살리라 |303| 신창균 (당시98세) 충북 음성 선산에 안장 1908년 충북 영동 출생 1919년 12세의 나이로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경찰에 체포 1940년 중국으로 망명 이후 중경임시정부 마카오 연락책으로 독립운동 1945년 해방 직전 입국, 일제에 구속 1945년 8월 16일 해방 후 석방 1946년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1948년 4월 남북협상 한국독립당 8인 대표 일원으로 방북 1949년 백범 김구 임시정부 주석 국민장 장례 실무 총책임자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옥고 1961년 통일사회당 총무 및 정책심리의장 1988년 민족자주통일협의회 고문 1990년 전국민주민족운동연합(전민련) 공동의장, 범민련 공동의장 1997년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범민족대회 대회장 2001년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금강산) 주석단 공동대표 2005년 3월 5일 운명 |302|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신자유주의시기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