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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규 (당시63세) 경기도 광주 교회묘지에 안장 1940년 6월 29일 전남 함평 손불면 북성리 출생 1941년 서울로 상경함. 자장면집 허드렛일부터 막노동일까지 안해본 일이 없음 1997년 58세의 늦은 나이로 노점 장사를 시작함 2002년 8월 21일 서울 중구청 단속에 의해 물건 압수당함 2002년 8월 23일 단속에 항의하러 갔다가 중구청 직원의 모욕적인 발언에 항의하며 분신 2002년 9월 6일 운명 |27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신자유주의시기 사회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외환위기 전까지 건축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97년 일자리가 줄어 들면서 노점상을 시작하였다. 동지는 평소 과묵하고 온순한 성격이었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하고 가족 들에게도 힘든 내색이 없었다. 그런 동지가 분신과 같은 극단적인 저항방법을 택 한 것은 청계천 재개발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부터 서울시가 노점상 단속 을 대폭 강화한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동지는 8월 한달 동안 3차례의 단속을 당했고 그때마다 구청직원과 용역반에 게 판매물품을 압수당했다. 자식뻘도 안 되는 용역깡패들은 욕은 물론 폭력도 서 슴지 않았다. 단속에 걸려 물건을 찾을 때는 5만원의 벌금을 내야하고, 이를 운반 하는 데 다시 2~3만원이 들었다. 견디다 못한 동지는 8월 23일 오후 1시, 이명박 시장 앞으로‘서민을 돕겠다던 공약을 왜 지키지 않는가’라는 내용의 항의 서한을 등기로 부쳤다. 그리고 오후 2시, 용역깡패 20여명과 구청단속반 10여명, 총 30여명이 2차 단속을 나오고 또 다시 물품 전부를 빼앗기자 오후 3시 20분경 중구청장실에 찾아가“왜 없는 사람 을 괴롭히는가”고 항의를 하였으며 중구청장실에서“불법장사를 하면서 뭐가 잘 났다고 항의하는가”라는 답변을 들었고 이에 스스로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 신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구청직원들은 분신에 대한 처리를 방관 한 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수습 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병원으로 옮겨져 다행히 의식을 되찾은 동지는 면회 온 사람들에게“끝까지 싸 워 나의 한을 풀어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지는 병상에서의 힘겨운 싸 움 끝에 9월 6일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동지의 죽음은 김대중 정권이 국내외 자본의 이해에 맞추어 추진한 신자유주 의 구조조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로 인해 도시빈민들은 실업∙반실업의 고통으 로부터 야기되는 삶의 불안정과 절대적∙상대적 빈곤상태의 증가에 고통받고 있 는 것이다. 특히 노점상의 경우 월드컵경기를 앞두고‘가로정비 및 노상 적치물 관리’에 의한 단속방안을 강화하였다. 동지의 죽음은 이러한 상황들과 특히, 청계천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 속 에서 야기된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끝내살리라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