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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한양대 재학시절 구학련 활동으로 학생운동을 하였다. 졸업 후 ’99년 재능교육에 입사하였다. 그해 쟁의부장을 맡아 비정규직 특수고용노동자들로서 는 최초의 노동조합(재능교육교사노조) 설립을 주도하였다. 재능교사노조는 비 정규직 노조운동의 최초의 도화선이 됐다. 독립사업자로 분류돼 4대보험은 물 론, 근로기준법 적용조차 받지 못하고 있던 학습지교사들로 설립된 재능교육교 사노조는 ’00년 역시 비정규직노조로는 최초로 한달이 넘는 파업을 진행, 임단협 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파업 이후, 회사는 파업 당시의 손해 배상액으로 노조 조 합비와 노조 간부의 급여를 가압류하는 등 공세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한층 더 강경해진 회사 측 태도에 노조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당시만 해 도 4,700명이 넘는 조합원 숫자가 수백 명 정도로 줄어들었고, 가압류 때문에 생 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상당수 노조원들이 노조를 떠나가기도 했다. 동지는 ’01년 3기 위원장에 당선돼 ’03년 10월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다른 간 부들과 함께 재능교육교사노조를 지켰다. 사용자들이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아 교섭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는 특수고용노조를 지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3년여를 끌어온, 끝이 보이지 않는 임단협 교섭을 위해 삭발, 단식, 천 막농성… 안해 본 것이 없었다. ’02년 겨울, 동지는‘손배∙가압류 철회’를 요구 하며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 20일이 넘는 기간 동안 차가운 천막 안에서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다. 동지는 위원장 임기를 마치고 현장에 복귀하였으나 사측의 탄압으로 힘든 투 쟁을 전개하여야 했다. 또한 동지는 ’03년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 초대 의장을 맡아 전국비정규직연대운동을 전개하면서, 또한 투쟁하는 노동자 정당 민주노동당 성북갑지구당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런 동지가 ’04년 8 월 위암말기 판정을 받았으나 한 번도 환한 표정을 잃지 않았고 또한 투병생활 속에서도 꼭 동지들의 곁으로 돌아가 활동하고자 했다. 그러나 동지는 ’05년 2월 10일 오랜 투병생활을 뒤로하고 오열하는 동지들을 두고 못다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투쟁의 한을 남긴 채 떠나갔다. “종태는늘그랬어요. 주변사람들이잔뜩걱정을짊어지고찾아가면, 병든몸을하고도오히 려씩씩한모습으로다른사람걱정까지덜어주는그런사람이었요. 아픈사람찾아갔다가우리 들이되려안심하고돌아왔는걸요. 그렇게, 마지막까지주변사람들챙기다, 그렇게간거죠.” - 2월11일빈소찾은애니메이션노조유재운위원장인터뷰중에서- 끝내살리라 |247| 정종태 (당시41세) 화 장 1965년 출생 1991년 한양대 사학과 졸업 1999년 재능 입사 1999년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노조 최초 파업시 노조 4지부 쟁의부장 2000년 노조 4지부 조직국장 2001년 3기 위원장 2003년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 초대 의장 2003년 민주노동당 성북갑지구당 운영위원 2005년 2월 10일 운명 |24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신자유주의시기 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