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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경남 울주군 언양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언양에서 생활하다가 울산 우석고등학교를 졸업하고 ’86년 11월 현대자동차에 입사하였다. 악덕 자본가와 그들을 비호 지지하는 독재자들의 야만적인 횡포성에 맞서 노동자 의식을 키웠 다. ’88년 소속 선거구 대의원 활동을 하면서 항상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면 서 노동조합 민주화에 앞장서 왔다. ’90년 4.28연대 투쟁시 선봉대로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진격하는 경찰병력에 맞서 현대자동차 정문과 구 정문을 가로지르는 도로에서 경찰과 맞서 싸우는 치열한 가두투쟁에 항상 선봉 에 섰다. 또한 ’90년 말부터 교양지‘단결과 전진’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91년 3대 집행부 정책연구부장을 맡았다. ’91년 12월말 성과분배정의실현 상 여금 투쟁을 벌이고 있던 현대자동차 노동자를 정권과 현대재벌은 물리력을 이 용하여 짓누르려 하였고, 여기에 맞추어 여론에서는 경찰투입이 임박했음을 앞 다투어 보도하고 있었다. 12월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투쟁의 파고는 다소 경직되었으나, 상용 5공장 조 합원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작업장을 사수한다는 결의로 뭉쳐 있었다. 동지도 정문을 사수하는 책임자로서 조합원들과 함께 경계근무를 서며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92년 1월 19일 공권력 투입설이 여론을 통하여 선전되면서 긴장감이 가중되기 시작했고, 당시 현장에는 500여명의 사수대만 남아 있었으나 12,000명의 경찰병 력이 회사의 담벽을 둘러싸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동지는 즉각 바리케이트 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하달받고 현장에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차량 바리케이트를 치기 위해 소속 조합원이 운전하던 브레이크와 전조등이 작동하지 않는 불량 차량이 동지와 충돌하게 되었다. 칠흑 같은 밤에 브레이크와 전조등이 자동하지않는 불량차량을 이동시키려고 운전하는 과정에서생긴 사고였다. 동지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식불명인 상태로 520여일 간 투병 생활을 하다가 ’93년 7월 1일 끝내 운명하였다. 서영호(당시31세) 양산 솥발산 공원묘역에 안장 1962년 3월 1일 출생 1981년 우석고등학교 졸업 1986년 11월 21일 현대자동차 입사 1989년 소위원 가입 1990년 4.28 연대투쟁시 선봉대 활동 1991년 소위원 활동, 노민추(노조민주화추진사업회) 사업부 3대 집행부 정책연구부장 교양지‘단결과 전진’편집위원 1992년 1월 21일 경찰침투 대비 바리케이트 설치 중 차량사고로 해성병원 입원 1993년 7월 1일 오후 9시 26분경 운명 끝내살리라 |23| |22|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김영삼정권 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