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page

김주익 (당시40세) 양산 솔밭산 공원묘역에 안장 1963년 2월 2일 부산 출생 1981년 2월 태백기계공고 졸업 1982년 8월 1일 (주)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입사 1990년 8월 한진중공업노조 대의원, 문체부장 1992년 8월 한진중공업노조 수석부위원장 1993년 8월 한진중공업노조 부위원장 역임 1994년 한진중공업노조 사무국장 역임 1994년 7월 한진중공업 LNG 선상 파업투쟁으로 구속, 강제휴직 1995년 8월 한진중공업 원직복직, 산업안전보건위원 1996년 8월 한진중공업노조 대의원 1997년 8월 한진중공업노조 대의원 2000년 11월 5일 한진중공업 통합 노동조합 초대위원장 당선 2002년 11월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 재당선(임기중) 2003년 10월 17일 고공크레인 농성 중 자결 |22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신자유주의시기 노동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가 다니던 한진중공업은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한 직후인 ’91년 노조활동을 문 제삼아 노조간부 12명에게 7천2백여만원의 손배가압류를 청구한 것을 시작으로 본 격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99년에는 한진건설과 합병한 후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으 며, 특히 전근대적인 노사관을 가진 건설분야 임원들이 노무팀을 맡게 되면서부터 노조를노무부서의하위부서로사고했을정도로공공연하게적대시하였다. 특히 ’99년 이후 단기순이익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02년에 다시 650명을 정리해고 하고, 138명을 교육발령했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노조의 활동에 7억 4천만원의 손배가압류를 자행했다. 또한 동지를 비롯한 20명의 간부의 임금과 노동조합비를 가압류하고, 7명의 집마저 가압류했다. 그리고 조남호 회장은 ’02 임단협에서 노동조합에 임금동결을 강요하면서, 회장일가는 주식배당금 78억원 을 챙겨갔다. ’02년 임단협이 타결되지 않고 해를 넘겨 ’03년까지 넘어갔다. 이에 동지는 ’03년 6월 11일 밤 현장에 있는 35m 고공크레인에 올라가 고공농 성을 시작하였으며 농성은 129일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사측은 동지가 목숨을 건 고공농성을 하는데도 악랄한 노동탄압을 계속했다. 한진중공업 노사는 7월 19일 해고자 복직, 손배가압류 철회 등 주요현안과 임단협을 합의했다. 그러나 회사는 노사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으며 이에 분노한 조합원들은 7월 22일부 터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600여 조합원들은 크레인 밑에 수십 동의 천막을 치고 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회사는 교섭을 회피하는 한편, 10월에 들어서는 조합원을 이탈시키기 위한 악랄한 행동을 시작했다. 한진중공업은 10월 14일 85호기 크레인 밑 4도크 에 있는 배를 폭력적으로 빼내고, 마산특수선지회 150명의 조합원에게 10월 15 일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150억의 손배가압류를 하겠다고 협박했다. 그 결과 10 월 17일 아침 조합원은 2백명으로 줄었다. 이런 극한적인 상황은 동지로 하여금 죽음을 선택하게 하였고 동지는“나의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을 하였다. 이후 1천여명의 조합원이 다시 투쟁을 시작하였고 11월 15일 손배가압류 철회 및 이후 노조활동에 손배가압류 금지, 해고자 17명 복직, 부당노동행위 관련자 처벌, 고용안정확약 등의 내용으로 노사합의가 됐다. 동지는 11월 17일 전국노동 자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솔밭산에 안장했다. 끝내살리라 |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