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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여 는 글 잊기 힘든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억들일수록 예고 없이 소환되곤 합니다. 약을 먹어도 사라지 지 않는 고통에 힘들어하는 아이를 붙잡고 기도 할 때, 아이가 신음처럼 내던 말은 지금도 환청처 럼 예고 없이 떠오르곤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 렇게 늦게 오시는 거야? 기도했는데, 왜 아직 안 오시는 거야?” 선교지에서 당시 네살 밖에 되지 않던 아이가 고통으로 신음할 때, 해줄 수 있는 것 이 아무것도 없는 줄 알면서도 뭐라도 찾으려 새 벽 거리를 돌아다녔던 기억은 11년이 지난 지금 도 고통스럽게 다가옵니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들고, 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창 22:10)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에 대한 기억이 그랬을 것 같습니다. 모리아산의 그림자가 스쳐 갈 때마다, 그의 영혼은 평생토록 수없이 베이고 또 베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버지였던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이의 목을 향해 칼을 겨누게 하신 것일까요? 순종에 대한 시험이 그 길밖에 없었던 것도 아닐 텐데, 한 아버지의 마음에 평생 사라지지 않을 상 처와 고통으로 남을 것을 아시면서도, 그분은 왜 그 선택을 하신 걸까요? 창세기 17~22장을 다시 읽으면서, 그 이유가 혹 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지 않겠 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17, 18장에 하나님은 아 브라함의 부르심의 목적과 언약, 그리고 이삭의 출생에 대해 이야기를 하십니다. 모리아산의 이 야기는 22장에 나옵니다. 그 사이에 소돔과 고모 라 사건, 아비멜렉과 이스마엘의 이야기가 있습 니다. 이야기가 연관성이 없는 거 같아도 하나님 께서 아브라함이라는 존재를 다듬어가고 계신다 는 관점 안에서 들여다보면 이야기들이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창 12:3 에서 말씀하셨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통해 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주제가 다시 반복됩니다 (창 18:18).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해서도 고민하셨 던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 성들에도 아브라함을 통한 복이 흘러가기를 원하셨던 것일까요? 소돔과 고모라는 우리에게 죄악과 심판에 대한 상징으로 이미 각인되어 있습니다. 에이즈의 본 산 같은 곳으로 인식되고 있는 그 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사라진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 약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본다면 하나 님의 생각이 요나와 달랐던 것처럼, 소돔과 고모 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사실은 우리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아브라함의 기 도를 6번이나 들으십니다. 의인 50에서 45, 40, 30, 20, 10명까지 하나님은 한 번도 아브라함의 기도에 짜증으로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은 소돔과 고모라의 상황을 아셨지만 즉시 심판 하지 않으셨습니다. 21절에 “내가 내려가서 그들 이 한 짓이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살펴보고 알고자 한다”라는 말씀이 마음 에 걸립니다. “살펴보고 알고자 한다”는 말이, 왠 지 심판을 늦추고 주저하시는 거 같은 느낌을 줍 니다. 소돔으로 떠나시기 전, 굳이 아브라함 앞에 서, “모든 나라들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이다”는 이야기를 다시 하시는 것은, 뭔가 아 브라함의 액션을 끌어내려는 듯한 느낌도 듭니 다. 결국 그것 때문에 아브라함의 중보가 시작되 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얼마나 정당했는가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님이 니느웨에 그러셨던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 에 대해서도, 긍휼의 마음을 가지셨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소돔과 고 모라 성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브라함이 얼 마나 알았을까?에 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최후 한 명의 죄인을 놓고도 자비와 심판의 정당 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시는 분이 하 나님이시고, 그 고통이 하나님의 선교로 이어진 다는 것은, 요나서 니느웨 성의 이야기를 통해서 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왼쪽과 오른쪽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 람들이 12만 명이나 있고, 가축도 많이 있는 이 큰 성읍 니느웨를, 내가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느 냐?”(요나 4:11) 긍휼과 심판 사이에 있어서 고통스러워하시는 하 나님은, 예레미야서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에브라임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 아닌가? 내게 하나님은 왜? 박재성 | 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