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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열사 약력 1973년 5월 서울 출생 1992년 3월 성신여자대학교 사범대 국민윤리교육과 입학, 14대 대통렬 선거감시단 활동. 1993년 불교학생회 회장, 한총련 '통일선봉대국토순례단' 참가 국민윤리교육과 시사토론 소모임 '물결' 결성및 학술부장 1994년 7월 대불련 정진지구 농활대 대장 1995년 사범대 학술부장 활동 1996년 12대 총학생회 정책국장 경염삼 대통령의 불법적인 대선자금 공개, 교육재정 확보와 성신여자대학교 학원민주화 투쟁과정에서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열흘간 단식, 총장실 점거농성 진행. 농성중 과로와 단신 후유증으로 4월 7일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운명(당시 24세) 1997년 4월 초혼장을 지내고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치됨 2004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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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의 삶과 죽음 1996년 성신대학교 12대 총학생회는 ‘예결산안 공개’, ‘등록금 소위원회 재개’, '김영삼 정권의 대선자금공개와 교육재정 확보' 등을 요구하며, 학원자주화투쟁을 시작하였다. 학교측이 학생들의 요구는 외면한 채 학생들에게 위협을 가하자 총학생회 정책국장 권희정 열사는 총학생회 총학생회장과 함께 학원자주화투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각오로 학교측이 즉각 협상에 나올 것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을 시작하였다. 단식은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10일간 진행되었다. 열사는 단식기간중 '김영삼 대선자금공개와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서총련동맹휴업', '연세대 노수석 열사 사망규탄 철야농성'등을 계속하였다. 단식 8일째 총학생장이 쓰러져 병원에 옮겨졌고, 권희정열사는 단식 10일쨰이던 4월 3일 주위의 만류로 단식을 해재하였다. 이후에도 계속된 총장실 점거중 가슴이 답답하다는 통증을 호소하여 4월 7일 새벽 고대안암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던 중 밤 11시 30분경 갑작스런 심근염으로 운명하였다. 이러한 열사 죽음의 근본적인 원인은 김영삼 정권의 반교육적 형태와 학생들의 목숨을 건 단식에도 철저히 외면으로 일관한 학교당국의 비교육적, 비인간적 횡포때문이었다. 이후 성신여자대학교 재학생, 졸업생들은 열사의 뜻을 이어 시험거부, 단식농성, 신문광고 등으로 학원자주화 투쟁을 이어나갔고, 마침내 5월 총장으로부터 열사의 죽음에 대한 공개 사과, 교학협의회 구성, 등록금중 5% 학생경비에 추가사용, 예결산 공개 등의 합의를 이끌어 냈다. 나로부터의 결의결사라는 말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힘들어하는 동지들에게 따뜻한 사람! 그러나 진짜 분노해서 싸울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 총학생회장님과 더불어 단식투쟁을 시작하여 합니다.................... -3월 25일 권희정 열사 단식 결의문 중 일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