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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 노원구 강북구 중랑구 성동구 광진구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 서초구 동작구 관악구 금천구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용산구 마포구 영등포구 성북구 동대문구 은평구 종로구 서대문구 중구 서울대학교 국회의사당 이화여자대학교 명지대학교 서대문독립공원 한양대학교 어린이대공원 세종대학교 서울숲 서울시립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오패산 북서울꿈의숲 초안산 월계근린공원 통일교육원 한신대학교 국민대학교 연세대학교 경기대학교 서강대학교 홍익대학교 경 희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건국대학교 고려대학교 북한산국립공원 백련산 경복궁 창덕궁 국립서울현충원 보라매공원 용마산 용산가족공원 노들섬 밤섬 전쟁기념관 남산 서울교육대학교 서리풀공원 가리봉로데오 월드컵공원 우장산 올림픽공원 숭실대학교 중앙대학교 정릉 신설동 건대입구 군자 안암(고대병원앞) 성신여대입구(돈암) 한성대입구 회기 청량리 동대문 경복궁 안국 독립문 증산(명지대앞) 아현 이대 신촌 상수 합정 마포 여의도 숭실대입구 상도 영등포구청 수유(강북구청) 쌍문 미아 4 4 4 4 4 6 1 21 4 1 3 3 3 2 2 2 5 6 2 6 6 5 9 52 7 용마산 보라매 7 7 대림(구로구청) 가산디지털단지 7 3 2 교대 7 5 7 2 2 7 2 7 1 2 서울대입구 경 1 경 경찰청인권센터 (박종철 기념관) 이한수군 추모비 김의기 추모비 홍익민주기념탑 1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선교교육원 2 옛 신민당사 5 구로공단 동맹파업 현장 9 옛 원풍모방 터 10 김영삼 기념도서관 11 여의도광장 6 구로구청 8 영등포 산업선교회 7 이한열 기념관 4 김대중 도서관 3 5 참교육 추모비 23 3ㆍ17의거기념비 6 의혈탑과 의혈비 7 민주화의 길 9 김창섭군 순국기념탑 8 3 강경대 추모 조형물 1 이한열 동산 2 4 국립4·19민주묘지 12 문익환 가옥(통일의 집) 14 함석헌 기념관 15 민주정의당 중앙정치연수원 터 17 4·19혁명사적비 근현대사기념관과 독립민주기념비 13 문익환 시비 10 사월학생혁명기념탑 14 최종수 김재준 추모비 19 10ㆍ28건대항쟁 기념물 20 4·19혁명 추모비 11 권희정 추모비 12 4·18기념비 13 4·19의거 기념비 17 민주열사 추모공원 18 민주혁명학생위령비 21 현정비 22 포충탑 24 4·19 50주년 기념비 15 학생운동 기념비 16 용산고등학교 성남고등학교 대광고등학교 덕수상업고등학교 경기고등학교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16 메모 방문지역 스탬프 4 이한열 기념관 이한열(1966~1987)은 1987년 6월 9일 6월민주항쟁이 본격화되던 초기 에 최루탄에 맞아 27일 만인 7월 5일 사망했다. 이한열의 가족은 1990년 12월 국가배상금으로 마포구 창전동에 가옥을 구입하여 기념관을 개관했다. 기념관은 1996년 6월 마포구 노고산 동으로 신축·이전했고 민주주의에 관한 전시와 교육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3 4ㆍ19혁명사적비 기념비 전면에는 ‘3·1삐라’ 격문 선언문 강령이, 후면 에는 ‘공명선거추진 전국국민위원회’ 주요 임원 명단 이 기록되어 있다. ‘3·1삐라사건’은 1960년 3·1절 기 념식이 거행되던 서울운동장 경축식장을 비롯해 서울 곳곳에 ‘전국 학도에게 보내는 결의문’이 배포되어 관 련자들이 경찰의 탄압을 받은 사건이다. 7 영등포산업선교회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인근의 노동 현장에 복음을 전파하고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선교를 목표로 1958년에 창립되었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거나 소 모임을 가졌던 것은 동일방직, 대한모방, 남영나일 론, 방림방적, 해태제과, YH무역, 콘트롤데이터 등 의 노동자들이었다. 선교회의 활동은 1990년대에도 계속되었고, 신군부는 도 시산업선교회가 회사를 ‘도산’하게 한다고 호도하면서 탄압했다. 선교회를 기 반으로 1977년에 ‘영등포노동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83년 1월 9일 ‘성문밖 교회’로 개칭했다. 10 민주노조의 탄생지 원풍모방 터 원풍모방은 1953년 설립된 양복 원단을 생산하는 굴지의 기업이었다. 1970년 12월 청와대 경호실 차 장을 지낸 인사가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경영이 어 려워지고 노동환경이 악화되었다. 이에 노동조합은 1972년 8월 9일 명동성당에서 회사의 부당한 처우와 직장 폐업을 규탄하며 농성을 벌였다. 미국의 본사가 1982년 7월 20일 공장 폐 쇄를 결정하자 9월 27일 경찰과 구사대가 농성장에 난입하여 노조지부장을 감금 하고 600여 명을 해산 및 해고시켰다. 또한 노조 간부들이 유죄판결을 받게 하고 해고자들을 블랙리스트에 수록하여 취업을 차단했다. 노동자들은 다른 민주노조 해고자와 함께 1984년에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결성하고 노동운동을 계속했 으나 정부의 탄압은 6월민주항쟁 때까지 계속되었다. 7 중앙대 ‘의혈탑’과 ‘의혈비’ 중앙대에는 3개의 민주화운동 관련 시 설이 있다. ‘의혈탑’은 10개의 단 위에 비 를 세운 것으로 중앙대 학생과 교직원이 1963년 9월에 건립했다. 이 탑은 4·19 혁명에서 발생한 희생자 고병래, 김태년, 서현무, 송규석, 지형헌, 전무영을 추모하 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4월 19일에 내무 부 앞, 세종로, 경무대 앞, 원각사 앞에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5·18광주민중 항쟁기념비’는 광주지역 출신의 학생들이 1988년 5월 18일 세운 것이다. 그리고 ‘의혈비’는 4·19혁명에서 희생된 6명과 1989년 8월 15일 거문도에서 의문사로 발견된 이내창의 죽음을 함께 추모하고 있다. 2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선교교육원(현 총회교육원)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총회선교교육원은 민중신 학과 인연이 깊다. 이곳은 민주화운동으로 제적을 당한 학생들과 해직 교수들이 머무르며 공부하고 교육하고 실천을 논의했던 곳이었다. 선교교육원 에서는 신학자 안병무와 서남동 박사 등이 신학과 민중을 연계하여 민중신학을 발전시켰다. 5 옛 신민당사(SK허브그린 빌딩) 1967년 2월 7일 창당한 신민당은 19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면서 해산했다. 1979년 8월 9일 무리한 사업 확장과 자본의 해외 유출로 폐업에 이르게 된 YH무역의 노동자 172명 이 공장에서 농성을 벌이다가 회사의 탄압을 피해 마포 신민당사로 들어왔다. 김영삼 총재는 이들을 기꺼이 맞이했고 재야가 농 성을 지원했다. 경찰은 8월 11일 ‘101호 작전’을 전개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김경숙이 사망하고 많은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었다. 국회는 10월 4일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을 변칙 처리했고 이로부터 12일 만에 부마민 주항쟁이 일어났다. 14 문익환 가옥(통일의 집) 문익환(1918~1994) 목사는 1974년부터 서거할 때 까지 이곳에서 생활했다. ‘통일의 집’이라는 명칭은 문 익환 목사의 아내 박용길 장로가 “누구나 통일을 논 의할 때 쓸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을 담아 명명했다. 서울특별시는 2013년에 문익환 가옥을 서울미래유 산으로 지정했다. 8 구로구청(부정선거 규탄 점거 농성장소) 1987년 12월 16일의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6월민주 항쟁으로 헌법이 개정이 되고 처음 치러진 것이었다. 학생과 시민사회단체는 공정선거감시단을 결성하고 전국적으로 감시활동을 벌였다. 공정선거감시단은 귤, 빵, 과자 상자로 위장한 부정투표함이 구로구청 현 관 앞에서 반출되는 것을 발견하고 선거 개표를 중단시켰다. 구로구청에 모인 학 생과 시민은 집회를 열어 정체가 불분명한 투표함을 보존시키고 납득할 수 있는 경위를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16일부터 시작된 학생과 시민의 농성은 12월 18일 오전 7시경 경찰의 해산작전으로 막을 내렸다. 11 김영삼 기념도서관 김영삼(1927~2015)은 1951년 정계에 입문하여 야당에서 민주화운동을 지원 했다. 그는 1987년에 통일민주당을 창당 했으며 6월민주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대 통령 재임 시기에 부정부패 척결을 비롯 해 군부개혁, 역사바로세우기와 금융실명제 등을 단행했다. (사)김영삼민주센터는 2012년 4월 18일 동작구 상도1동에 ‘김영삼 기념도서관’을 건립했다. 8 숭실대 ‘김창섭군 순국기념탑’ 숭실대 4학년 김창섭은 1960년 4월 19일 소방차에 탑승하여 시위를 벌이다가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이 탑 인근에 위치한 ‘민중해방열사 박래전 열사 기념비’ 는 1988년 6월 4일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 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 등을 외치며 분신한 박래전의 넋을 기리고 있다. 15 함석헌 기념관 함석헌(1901~1989)은 1956년부터 「사상계」를 매 개로 활동했다. 1958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 다’를 발표하여 자유당 정부를 비판했으며 투옥되기 도 했다. 1970년에 시사평론 잡지 「씨 의 소리」를 창간하여 민주회복을 호소했으나 당국의 통제로 폐간 과 복간을 반복했다. 도봉구는 인권운동가, 독립운동가, 문필가인 함석헌을 기억 하기 위해 쌍문동 자택을 기념관으로 개조하여 2015년 9월에 개관했다. 9 구로공단 동맹파업 현장(로데오거리 일대) 구로공단에서는 1984년 후반부터 민주노동조합 인 정을 요구하는 주장이 분출되었다. 4월에는 임금인 상 요구과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노동운동탄압 저지투쟁위원회’를 창립했고 6월에는 ‘구로지역노조 민주화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러자 경찰은 대우 어패럴의 임금인상투쟁이 불법이라며 노동조합위원장 등 3명을 구속시켰다. 대 우어패럴 노동자들은 6월 24일부터 항의 파업에 들어갔고, 인근의 효성물산, 가 리봉전자, 선일섬유, 남성전기, 세진전자, 롬코리아, 삼성제약, 부흥사 등의 노동 자들이 동맹파업 또는 준법농성 등을 벌였다. 재야와 학생 그리고 지역의 노동 운동 진영에서도 항의농성과 연대활동을 전개했다. 정부와 회사는 가족을 이용 해 파업 해산을 종용했고, 파업이 종료된 이후에는 44명을 구속시키고 1,300여 명을 해고시켰다. 12 국립4ㆍ19민주묘지 1960년 3·15의거부터 4·19혁명에 이르 는 동안 185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 상자가 발생했다. 수유리에 ‘4·19묘지’가 조성된 것은 5·16군사정부가 집권하던 1963년 9월이었다. 군사정부의 집권이 계속되면서 4·19혁명에 대한 관심이 점 차 낮아졌고, 4·19묘지의 관리도 소홀해 졌다. 김영삼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를 선언하고 이를 실현하는 방안으로 ‘4·19 묘지 성역화사업’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1995년 4월 완공과 동시에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2006년에 국립4·19민주묘지로 재명명되었다. 9 서울대 ‘민주화의 길’ 서울대학교 교내에는 약 20개의 민주화운동 관련 시설들이 산재해 있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고 있다. 2009년 11월 17일 ‘민주화의 길’이 만들어졌는 데 1.2km에 걸쳐 19명의 추모비를 경유하도록 되어 있다. 추모 대상자는 고순자, 김치오, 안승준, 박동훈, 손중근, 유재식, 김태훈, 우종원, 김성수, 박혜정, 김세진, 이재호, 박종철, 최우혁, 황정하, 조정식, 조성만, 김상진, 이동수이다. 17 민주정의당 중앙정치연수원 터(가락동 쌍용아파트 일대) 1985년 11월 18일 ‘전국학생총연합’은 서울지역 14개 대학생 191명을 규합하여 민주정의당 중앙정치연수원 본관을 점거했다. 학생들은 “독재타도”와 “미국은 물 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미국과 정부 그리고 야당 등에 보내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경찰이 농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부상자들이 속출했으며 학생들은 모 두 구속되었다. 이와 유사한 일이 1988년 11월 26일에도 있었다. 서울지역총학 생연합 산하 애국결사대 소속 16개 대학 42명이 “전두환 구속”과 “미제 축출” 등 의 구호를 외치며 본관 2층 옥상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1 명지대 고 ‘강경대 추모 조형물’ 1991년 4월 26일 ‘학원민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 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에 참석했던 강경대는 경찰에게 구타를 당했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사망했다. 4 서강대 ‘김의기 추모비’ 서강대 4학년 김의기는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진상이 왜 곡되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는 5월 30일 오후 종로5가 소재 기독교회관 6층 607호 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 물을 배포하고 투신했다. 유서에서 그 는 광주에서 “무참한 살육이 전개되었음 을 알리고, 유신잔당에 맞서 싸울 것을 호소”했다. 그가 몸담았던 유네스코학생 회(KUSA) 출신 회원들은 1984년 11월 그의 죽음을 기리는 비석을 로욜라도서 관 옆에 건립했으나, 1985년 7월 학교 당국에 의해 철거당했다. KUSA회원들은 1988년에 ‘고 김의기 열사 추모비’를 다시 세웠다. 6 성남고 ‘3·17의거기념비’ 성남고등학교 학생 400여 명은 1960년 3월 17일 오 후 1시경 영등포구청 앞 광장과 서울극장 앞으로 집 결하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시작했다. 이를 기념하는 2개의 기념시설이 건립되었다. 이와 함께 1989년에 건립된 ‘교육민주화운동다짐비’도 있다. 3 홍익대 ‘홍익민주기념탑’ 홍익민주기념탑은 이 학교 학생들이 참여한 반독재민주화 운동 전반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4·19혁 명 당시 경무대 앞에서 총탄에 맞아 치료를 받다 사망한 나 영주가 강조되고 있다. 2 연세대 ‘이한열 동산’ 연세대에는 이한열과 노수석의 죽음을 기리는 시설 이 있다. 이한열은 1987년 6월 9일 ‘박종철 열사 고 문치사 사건은폐 규탄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 세인 결의대회’에 참가했다가 정문 앞에서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7월 5일 사망했다. 노수석은 1996년 3 월 29일 ‘대선자금 공개와 국가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서총련 결의대회’에 참가했 다가 종로에서 경찰에 의해 사망했다. 10 한신대 ‘문익환 시비’ 문익환(1918~1994)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전념했다. 그의 삶에서 한국 사회에 가장 커다란 충 격을 주었던 사건은 1989년 2월 25일 평양을 방문 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난 일이었다. 그는 4월 2일에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는 데 이는 2000년 남북정상의 ‘6·15선언’의 기초가 되었다. 2008년 개인과 단체의 성금을 모아 문익환을 추모하는 시비를 교정에 건립했다. 1 경찰청인권센터와 ‘박종철 기념관’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 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 관련 수배자의 행방에 대해 조사했고 원하 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물고문 등을 자 행하여 그를 사망케 했다. 한편 1985년 에 이곳에서 고 김근태 의원에게 23일 간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행한 일도 폭로되었다. 경찰청은 2005년에 인권센터 로 용도를 변경하여 시민에게 개방했다. 5 용산고 ‘이한수 군 추모비’ 4월 26일 10시 20분경 계엄사령부의 스피커를 통해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임이 알려졌고, 10시 30분경 라 디오에서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흘러나왔다. 정권은 이 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지만 경찰의 발포는 멈추지 않 았다. 이날 용산고등학교 3학년 이한수가 종로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3 김대중 도서관 김대중(1924~2009)은 1961년 민의 원에 당선된 이래 야당에서 활동하며 재야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1998년 제15대 대 통령에 취임했고, 2000년 노벨평화상 을 수상했다. 대통령 임기를 마친 김대 중은 그가 설립했던 아태재단 일체를 연세대에 기증했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2003년 2월 김대중 도서관이 건립되 었다. 김대중 도서관은 민주주의와 평화 구현 그리고 빈곤 퇴치를 목적으로 설 립되었으며, 아시아에서 최초로 설립된 대통령 기념도서관이라는 의의도 있다. 6 여의도광장(여의도공원) 1972년에 조성된 이곳은 ‘5·16광장’으로 명명되 었다. 여기에서는 전국농민대회가 자주 개최되었 는데 1989년 2월 13일과 2005년 11월 15일의 전 국농민대회가 대표적이다. 1989년에는 2만여 명 이 참석한 ‘고추 전량수매 쟁취 및 수세폐지 전국 농민대회’가 열렸고 수세 절감과 ‘전국농민운동연합’ 결성에 긍정적인 영향 을 미쳤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 4월 24일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했다. 11 국민대 ‘4·19혁명 추모비’ 국민대 학생 이청수는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에 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고 김윤기 노동해방 열사 추모비’는 노동운동 과정에서 회사측의 탄압에 항의 하여 1989년 4월 3일 분신한 김윤기를 기리고 있다. 17 대광고 ‘4·19의거 기념비’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은 1960년 4월 19일 아침부터 세 차 례에 걸쳐 국회의사당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은 학생과 교 사를 폭행하고 연행했다. 오후 1시 30분경 학생들은 네 번 째 시위를 시작하여 1,000여 명이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 여 집회에 참석했다. 19 덕수상고 ‘최종수 김재준 추모비’ 덕수상업고등학교 2학년 최종수는 1960년 4월 19일 11시 경 부산진경찰서 앞에서 전개된 시위에 참여했다가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했다. 덕수중학교 2학년 김재준은 4월 19일 밤 8시경 서울시청 앞에서 총탄에 맞아 세브란스병원 으로 후송되다가 사망했다. 16 서울시립대 ‘학생운동 기념비’ 서울시립대 민주동문회가 1999년 4월에 건립한 ‘시대 와 더불어 민중과 함께’라는 기념비는 조형물과 건립 취지 등을 담은 설명판으로 구성되었는데, 현재는 조 형물만 남아있다. 이 기념비는 6월민주항쟁을 중심으 로 민주화운동 전반을 기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8 한양대 ‘민주열사 추모공원’ 한양대 ‘민주열사 추모공원’에는 1990년 11월 8일 민 주화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는 유서를 남 기고 투신한 최응현, ‘녹화사업’ 대상자였다가 1983년 에 의문사한 한영현,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다 2010년 사망한 김헌정을 기리는 추모비 등이 있다. 20 건국대 ‘10ㆍ28건대항쟁 기념물’ 전국 26개 대학교 학생 2,000명이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에 집결했다. 이들은 신군부의 장기 집권 기도와 통일 을 저해하는 미국에 대한 반대를 실천할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을 결성하려고 했다. 집회가 열리자마자 경 찰은 해산작전에 들어갔고 이에 대응하 여 학생들의 농성이 시작되었다. 경찰은 10월 31일 대규모 병력으로 진압작전을 단행했고, 학생운동 사상 단일사건으로 가장 많은 1,525명을 연행했다. 검찰은 이 들 가운데 1,287명을 구속했다. 12 성신여대 ‘권희정 추모비’ 성신여대 학생들은 1996년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 지 합리적 등록금 책정을 위한 재단과의 대화를 요구 하며 단식농성을 벌였다. 이 농성에 참여했던 권희정 은 과로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4 경희대 ‘사월학생혁명기념탑’ 경희대 학생 이기태는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 들의 시위에 참여했고 다음날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중앙도서관 옆 ‘경희평화민주동산’에는 인혁당사건으 로 사형당한 이수병 선생의 추모 동상이 있다. 13 고려대 ‘4·18기념비’ 1960년 4월 18일 12시 50분 점심시간 사이렌 소리 를 시작으로 고려대 학생 3,000여 명이 집결하여 시 위에 들어갔다. 이들은 격문을 발표하고 태평로 국회 의사당까지 행진을 벌였다. 한편, 학생회관 앞에 있는 ‘강제징집희생자 진혼비’는 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사망한 6명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15 한국외국어대 ‘4·19 50주년 기념비’ 교수회관 앞에 있는 4·19 50주년기념비는 이 학교 학생들이 4월 19일 정오 무렵에 도심으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인 것을 기념하여 설치했다. 기념비 인근에 는 학원민주화운동을 기념해 1988년에 설치한 ‘한국 외국어대학교 제2건학선언문’을 새긴 안내판도 있다. 21 경기고 ‘민주혁명학생위령비’ 경기고등학교 재학 또는 졸업생 4명이 1960년 4월 19일에 발생한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최 정규와 박동훈은 연세대와 서울대에 재학 중이었 고 , 고완기는 3학년, 이종량은 2학년이었다. 23 서울교대 ‘참교육 추모비’ 이 조형물은 재학 중 사망한 서울교대 학생 남태 현과 박선영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박선영은 1987년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유서를 남기고 운 명했고, 남태현은 1988년 학원민주화를 요구하 며 분신했다. 22 수도전공 ‘현정비’ 수도전공(당시 경성전기공고) 학생들은 1960년 4월 19일 오후 1시경 중앙대 학생들이 대열을 지어 이동하 는 것을 목격하고 행진에 합류했다. 서대문 이기붕 집 주 변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최기태가 ‘대한반공청년단’에게 동양극장으로 끌려가 심한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24 서울고 ‘포충탑’ 서울고등학교 학생 안승준은 4월 19일 중앙청과 경 무대 등에서 전개된 시위에 참여했다가 오후 3시경 에, 김치호는 같은 날 오후에 국회의사당 앞에서 고 교생 10여 명과 결사대를 편성해 경무대로 진격하 다가 총탄에 맞았다. 서울 민주화운동 역사지도 16 근현대사기념관과 독립민주기념비 2016년 5월 17일에 개관한 근현대사기념관은 3ㆍ1운 동의 발상지인 봉황각, 순국선열들의 묘역, 국립4ㆍ19 민주묘지 등이 위치한 장소의 특성을 고려하여 건립 되었다. 1층의 상설전시실은 ‘짓밟힌 산하, 일어선 민 초들’, ‘시대의 마감, 민주의 마중’, ‘우리가 사는 나라, 민주공화국’을 주제로 한다. 기념관 정원에는 온라인 모금으로 조성한 ‘독립민주 기념비’가 있다(2016년 8월 15일에 제막). 기념비는 백범 김구의 흉상, 독립정신 과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