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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을 입었고, 홍상기 · 권영환 · 박시무 · 이승권 · 김광렬 · 백정현 · 함대경 등 주민 7명이구속되거나수배되었다. 6 . 27 강제 철거 이후 주민들은대책위원회의 재건을 시도하였으나 지도부 구속 등으로 통력이 약화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89년 겨울을 전후하여 시위는 마무리되었다. @하대원시위의의의와성과 하대원 철거 반대 시위는 주민의 1/4이 부상당하거나 구속될 정도로 주민들의 저 항은격렬하였다. 이는성남의 주거 문제가그만큼심각하였고,주민들의 조직력과 투쟁력이 높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비록 김덕순 할머니가 숨지고, 7명 구속, 19명 부상 등 많은 희생이 있었으나 이후 시영 아파트 건설 등 성남시의 주택 정책에 상 당한영향을미쳤다. 또한 하대원 철거민들은 시위 과정에 ‘복정통일용노동조합’ , ‘성남노점상연합 회’ 와 연대하여 투쟁함으로써, 성남 지역 최초의 도시 빈민 연대를 이루었으며, 도 시 빈민의 생존권에 대한 인식을 확대 · 심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철거 민들이 치열하게 씨우고다른도시 빈민운동진영과 연대할수 있었던 것은주민들 의 교육과 조직 및 투쟁 활동을 지원한 이상락 · 김광수 · 권혁식 · 권영환 퉁의 도 시 빈민활동가그룹이 있었기에가능했던일이다. 2) 분당 신도시 건설 반대 (1) 반대 시위 배경 1989년 4월 분당 신도시 계획 발표 시점에 분당의 가옥주는 2076세대 8021명, 세 입자는 약 60CO세대 1만 8에0여 명 가내 수공업과 화훼 농가 종사지는 약 4400명으 로 파악되고 있다. 당시 분당의 세입자들은 보증금。l 50∼100만 원 정도인 전셋집에 서 살거나 보증금 10∼20만 원에 월세 3∼5만 원 정도를 내고 시든 등 수정 · 중원 지 역보다 훨씬 열악한 주거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한편 정부는 강남의 주택 수요를 충족시키고 주택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1989년 4월 27일 분당 지역 약 1785만m'(S40만 평)에 10만 5000호가 입주할 분당 신도 시 개발 계획을 발표하였다. 분당 신도시는 서울시 강남 지역 중산층의 주택 욕구 충족을 위해 주로 중대형 위주의 아파트를 건립하기로하였으며, 이는 원주민과 세 98 처17권 민주주의←민주화운동과시민사회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