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page

이 몇 가지 사안은 왜 성남에서 화이트칼라 넥타이 부대가 주력이 되지 않고, 다방 종업원에서 식당 주인에 이르는 계급 범주로서의 쁘띠부르주아지 도시 비공식 부 문 종사자들이 주력이 되었는가를 설명해줄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항쟁의 이 슈에 대하여 잘 모르더라도 우리 지역의 젊은이를 두들겨 패는 백골단만은 도저히 용서할수 없었던 술집 아줌마들의 용감한 저헝들이 이해되는 이유가 된다. 국가와 자본의 규정력이 독점적으로 관철되던 당시의 상황은 물론 전국적 흐름 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그러나 지역을관통하는 이러한 흐름들은 결코과소평 가될 수 없는 것이다. 성남의 6월 민주화운동은 이러한 맥락을통해서 그 살과 피가 흐르는 지역 현실을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제2젤 1987년 6월 성 남 민주화운동 전개 1. 4·13 호헌 철폐와주민교회 단식기도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는 거짓으로 연초 부터 국민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서울대학교 박종철 학생 고문치사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잔혹한 고문에 의한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전두환 군부 독재 권력의 폭력과 실체를 여실히 보여줌으후 인해 ‘2 ·7 추모대회’ 와 ‘3 · 3 국민평화대행진’ 으로 이어지면서 급기야 ‘4 . 13 호헌조치’ 에 대한 반발 로국민 대저항의 불씨가 지펴져 올랐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가 3월 12일 서울시 종로5가 기독교회관 대강 당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주최로 ‘고난 받는 이와 함께하는 목요 예배’ 를드린 이후동대문경찰서에 불법 연행되는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주민교회 와 한국기독교장로회 경기노회 성남시찰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성남광주지역 제1만정의사회를위한행동,민주회운동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