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page

정책은 같은 민족이 선택할 수 없는 폭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처절한 저항의 씨앗을내포하고있었던것이다. 광주대단지주민들의극한적생존환경과처절한투쟁은 ‘모든요구조건의무조 건 수용’ 이라고 쓰인 정부의 항복문서를 받아냄으로써 최근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승리를얻어냈다.그러나더욱소중한것은물리적인요구조건을쟁취했다는측면 보다는 함께’ 싸워서 얻게 된 공동체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정신적 경험이고, 또한 싸워서 이겼다는 소위 ‘폭력의 정치학’ 에 대한 학습 효과에서 찾아질 필요가 있다. 공동체적 유대감과 정치 학습 효과는 향후 성남 지역 모든 운동의 역사적 기반이 된다. 1989년에 한국노총 성남시협의회와 성남 지역 민주노조협의회(약칭, 성노협)가 중 앙으로부터의 부담을 이겨내고 하나의 지역 노동자 단체를 건설하게 된다. 이때 ‘지역 문제의 자주적 결정’ 이 중앙에 제시된 설득 근거였다. 이 사건은 비록 며칠 만에 원상 회복되고 말았지만 성남 지역의 운동성에 광주대단지 사건이 어떻게 영 호탤 미치고 있는지를상징적으로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또한 도시 빈민 문제를 전국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NCC)의 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는 성남에 주민교회를 설립하여 이 문 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주민교회는 성남의 도시 문제를 이해히는 코드가 되었다. 또한 도시 비공식 부문이 절대 다수 를차지했던 지역 사회 환경 속에서 ‘한 울’ 퉁의 야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편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 세 개의 성남 공단에는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의 많은 기업들이 이전하게 된다. 산업 노동과비공식 노동시장의 규모가 7만 명을넘어서 게 되면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기반이 조성된다. 광주 민주회운동도 성남에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두 도시의 ‘동형성’ 을 주목 한 군부는 성남에 대규모의 공수부대를 투입했기 때문이다. 감시의 수준이 광주에 버금기-야될정도로도시의 폭발력이 위협적이었다는반증으로보인다. 이에조웅 하여 군부 정권의 탄압 강도도 매우 높았다. 1980년에 김종태 열사가 분신한다. 광 주를 전국에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동시에 성남의 운동 역량을 흔들어 깨우는 처절 한 외침이었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모든 부문에서 질적 차원에서의 전환들이 이뤄지는중요한계기가되었다. 이상이 극단적으로 의 t 술한 6 월 민주회운동 이전의 성남 지역 운동사이다. 그러나 78 제7권 민주주의-민주화운동과시민사회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