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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입장이 분할되었다. ‘하나의 전선론(민중통일 전선론)’ 과 ‘두 개의 전선론(민주연합 전 선론)’이 대결하였고, ‘독자후보론’과 ‘비판적지지론’으로나뉘었다.이것은독자 적 정치 세력화와민주대연합론의 분열로나타났다. 2. 대중정당 운동의 시작 1) 독자적정치세력화실험 ‘국민승리21’ 이전의 독자적 정치 세력화 주장은 민중당과 민주노동당으로 이어 져 왔다. 이 시기 한국자본주의는독자적 정치 세력화가기능할정도로충분히 발 전했고, 따라서 비합법이나 반半합법 전술은 무의미해졌을 정도로 정치적 환경이 변화했다논 판단에 기인한다. 이러한 흐름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백기완 후보를 출마시키고 선거 캠프를 중심으로 ‘민중의 당’ 을 창당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민중의 당은 1988년 제13대 총선에 16명 의 후보가 출마해 4.3%의 지지율을 기록히는데 그치면서 바로 깃발을 내려야했다. 그해 4월 창당한한겨레민주당도 63개 지역구에 2000여 명의 당원을모으는데 그 쳤고, 전국 득표율은 1.28%에 불과했다 이어 1988년 9월 민중의 당과 한겨레민주 당이 통합하고,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전민련) 일부가 가세하여 1990년 11월 민 중당을 출범시켰다. 1992년 저114대 총선에 10or성의 후보를 내고 민주당과의 연합 공천을 선언한 소위 통합민중당이 선두에 섰지만, 실제 출마한 51명 후보 전원이 당선괴는 거리가 멀었다. 성남에서도 공단을 중심A로 조직 기반을 가지고 활동하 던 후보를 내세웠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결국 당은 해체되었고, 민중정치연합과 진 보정치연합등으로그 명맥은 이어갔지만 민중운동 진영의 독자적 정치 세력화 1차 실험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성남에서도 민중의 당, 민중당, 진보정치연합 등 전 국적 일정에 맞춰 활동을해 왔지만그성과는미미했다. 2) 전국연합의출범 한편 민주대연합론의 입장은 아직 대중의 정치 역량이 충분하게 성숙하지 못했 제1편-정의사회를위한행동, 민주화운동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