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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부축 당하던 모습 (1987) 일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 사무실이 폐쇄되었으며, 이어 반제동맹 사건이 발표됐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의 해가 밝았다. 4.6월민주화운동 1) 발생배경 1987년 1월 15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 중앙일보 』 석간 사회 변에 보도되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시대의 명언을 남 긴 이 사건은수배 학생을잡기 위해 참고인으로 연행한후물고문 과 전기 고문을 가해 꽃다운 젊음을 하루 만에 죽음으로 몰아넣었 디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역사적인 1987년의 서두를 열었다. 불 에 기름을 부은 것은 4월 13일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특별 성명을 통해 ‘여야가합의하면 개헌할 용의가 있었지만, 야당의 억지로불 가능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현행 헌법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고 발표했고, 4월 27일 한국노총은 4. 13 호헌조치를 ‘환영한다’ 는 성명을 발표했다. 경찰과 보안사는 잇따라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 담화 다음 날, 김수환 추기경의 비 난을 시작으로 노동자와 학생 등의 전면적인 반대의 물결이 일었 고,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 가 발족되었다‘ 6월 9일 서울 에서만 6만 경찰이 동원돼서 거리를 메웠고, 주요 인시들은 가택 연금되었다. 바로 그날 연세대학교에서 6 . 10대회 출정식 시위에 참여했던 이한열 학생이 뒷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의식 불명 상태가 됐다. 경찰이 시위대를 겨냥해 쏟으로써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던 문제의 ‘직격 최루탄’ 이었다.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부축당히는사진은 『 뉴욕타임스 』 l면 머리기사로 실렸다_1s 한편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는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었 15 이한엘은 결국 1987년7월 5일 사망했으며, 7윌 9일에 대규모추모제기 열렀다 60 제7권 인쥬주의-민주회운동과시민사회왈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