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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젤 도사 형성과 빈민운동의 래동(1960∼1970년대) 1. 도시빈민과광주대단지사건 유신 전야, 1970년대의 문을 연 것은 한 청년의 분신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오 후 1시 30분, 청계천 평화시장 앞길에서 자기 봄을불사른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은 이후 민주화운동의 결정적 분기점이면서 또한 빈민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했다. 그가 외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당 시의 시대 상황을 압축한 시였다. 최저 생계비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17세의 청 춘을 청계천의 피복 공장에서 시작한 그는 하루 15시간의 노동과 저임금, 폐병에 시달리던 어린 여공들을 대변한 것이지만 여공들의 노동계를 사회적 시선으로 바 라보도록하였고, 빈민들의 현실을전국민에게 드러내는사건이 되었다. 그로부터 1년 여 뒤, 1971년 8월 10일 오전 10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기운데 경 기도광주군중부면 광주대단지 성남출장소 인근에 모여들기 시작한 3만여 명의 주 민들은 서울시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11시경, 서울 시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판단 한군중의 분노가폭발했고출장소로몰려가기 시작하면서, 이후 언론을통해 경쟁 적으로분칠된 광주대단지 사건이 발생하였다. 1966년에 작성된 달랑 두 쪽짜리 「대단지 주택 조성 계획」에서 출발, 1968년 5월 7일 「 경기도광주군중부면 일단의 주택지 경영사업 계획」에 대한건설부의 승인 을 거쳐서 도달한 이날의 사태는 그대로 성남이라는 도시의 출생 신고서가 돼버린 셈이다. 1969년 3월 4일, 수십 대의 불도저들이 굉음과 함께 사과 껍질 벗기듯 산을 강+아내는 것이 택지 조성 사업의 거의 전부인 이 대담한 계획의 애초 구상은 무모 하고 원대하였다. 1966년 당시 서울 인구의 15%에 해당히는 10 만 가구 55만여 명의 주민을 약 991만 735m'(300만 평)의 땅에 3년 안에 수용하겠다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도시 건설 사업이었 다. 당시 13만 가구를 넘을 것으로 추정되던 무허가 건물 대부 분에 해당하는 규모였 다. 그러나사건은 이미 졸속 계획 속에 내재되어 있었다. 6시 간에 걸친 시위로 주민과 경찰 100여 명이 부장을 당했고, 관용차와 경찰차 4대가 방화로소실되었으며,2000여만원의 재산피해를남긴사건다음날,내무부의 ‘광 제1표정의사회를위한행동,민주화운동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