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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이 있었다. 대인 관계가 원만했다. 그러나 성문연 시절 하동근은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성문연은 단체연합 ’ 이다. 개인하동근이 어떤 역할을 할틀 이아니었다. 권오원의 경우에는 적극적이었다. 노래마을에서 나와 솔로로 활동하던 권오원은 성문연에서 지역 판을짜고 또 어울려 시국을 논하는 것을 매우부러 워했다. 그에 권오원이 생각해 낸 것은 시민 단체와 같은 문화모임이었다. 같은 감성 세대인 백지논 · 백창우 · 전순필에게 그런 언질을 자주 했고, 입장 이 곤란한 그들은 이론 세대를 대표하는 필자에게 미뤘다. 슬슬 필지는 권오원을 피했다. 필자도 입장이 난처했던 것이다. 또 민중운동을 한다는 지부심이 시민 단 체 성격의 활동을 기피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무튼 민중운동의 기운이 왕성했던 시 기에는문화운동도이론세대가분위기를주도했었다. 그러나 힘의 논리로만 접근할사안은 아니다. 노래마을의 예를들면, 백창우가 지 역 출신이라면 한국외국어대학교 운동권 출신 우위영은 학생 출신이었다. 또 타고 난 가창력의 우위영이 기수였다면 백창우는 작곡에 더 열성이었다. 백창우는 우위 영이 문화판에 남기를바랐다.그러나우위영은민주노동당으로향했고,거기서 한 국 정당 사상 최장수 대변인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백창우는 우위영의 이탈로 큰 상실감을맛봤다 . 셋째, 저항 문화와 대안 문화의 갈등에서는 후자가 승리했다. 민중운동으로서의 문화운동이 끝까지 저항 문화였던 것은 정치판을 갈아엎어야만 문화도 확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대안 문회는 지금 현재의 문화에 주목했 다. 문화연대, 민예총이 대안 문화에 방점을 찍고 활동을 개시했는데, 성남은 올드 보이 하통근이 두터운 인맥을 기반으로 전면에 나섰다 더불어 역전됐다. 감성 세 대로분류될 개인들이 지역 문회운동판을주도해 나갔다. 이러한흐름을개량주의로성토히는목소리가높았긴했다허나그것은중앙매 체의 지면에 글을 싣는 전국구 논객들의 푸념이었고 문화운동 일선의 이론 세대는 앞날을 두고 깊은 회의에 빠졌다. 단체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일을 추진할 동력이 바닥을 드러낸 상태에서 회원들은 떨어져 나갔다 거기에다 개인적으로 먹고사는 전국구상외 전순필(출처 솟대) 저 1]2편-공정사회를위한실천,시민사회 활동 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