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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흐르면서 차츰 청년 단체에서 문화 행사를 주도해 나갔다. 성문연의 연대 활동 은 탄력을 잃었다. 연대 활동을 하지 않게 되자 연석회의도 열지 않았다 일이 있어 서모이는것이아니라그냥술자리에서어울렸다. 3) 시민운동적 성격이 강했던 시기 1990년대 후반 이후 하동근 · 권오원을 중심으로 성남 지역 문화연대가 결성되었다 엇비슷한 시기 송창 · 김태헌 · 남동호 · 이병철 등 지역 화기들이 ‘한외골미술인회’ 리는 단체를 꾸렸다. 분당 뉴코아백화점에서 창립전을 열었는데 그림마을처럼 가두 행사에 결 합하지는않았다. 김태헌이 특별한 일을 했다. 성남시청에서 자금을 들여 조성한 조형물의 태반이 특정 조각가의 작품인데 그것은문화의 다양성에 위배될뿐만아니라작가선정에 비리가개입됐을수도있다는의혹을제기한 것이다. 김태헌은순전히개인의발품 으로 성남시 공공조형물을 찾아나섰다. 문화연대는 가입 대상으로 단체와 개인을 가리지 않았다. 시무실 중심으로 활동 했다. 지역 문화 사업을 기획, 또 문화 분야에서 정책을 입안하여 성남시청에 협조 하거나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성남시에서도 운동권 인시들의 정계 진출이 활발했 다. 성남시의회에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여릿 진출했다. 그러한 조건이 문화연대가 시민운동적 성격을띠고활동하게 된바탕이었다. 성문연 시절에 정책이라는 것은 PD(민중민주) 진영과 NL<민족자주) 진영에서 서로 다 른 시각으로 시국에 대처하는 것이었다. 문화연대는 성남시의 여건에서 추진 가능 하고바람직한사업이무엇인가를주로고민했다.옳고도현실적인활동이었다. 전순필의 경우에는 호구지책의 한 방편으로 굿판에 뛰어든 것이 박수무당으로 굳힌 계기가 됐다. 신내림을 경험히는강신무가 아니었다. 스승 · 제자관계를 맺어 황해도 굿을 전수받았다. 본 글을 쓰려고 인터뷰 하던 중 전순필이 인간문화재 이 수자로 지정된사실을 알게 됐다. 이는 성남시 문화운동이 이룬 쾌거라할 것이다. 돌쇠는 남한산성 안에 대안학교를 설립했다. 풍물 축제에서 돌쇠가 풍물패 아이 들을 이끄는모습을봤다. 고생하는 만큼보람도크리라 백지논도 이것저것 세파에 치이다가 홀연 불가에 귀의했다. 그림은 여전히 그린 다. 그런데 백지논은 고등학교 때에 이미 입산 전력이 있었다. 기간은 짧았다. 형이 제2편 공정사회를위힌실천,시민사회활동 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