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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들이 만남의집을 근거지로삼았다. 그활동가중에 돌죄가 있었는데, 만남의집은 퇴근길에 노동자들이 들러 문화활동을하던 공간이었다 2) 문화운동단체들이 주역으로나섰던 시기 :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성남시에는 운동권이라는 공동체가 형성되 었다 문화운동 인력도 이때부터 조직화를 시도했다. 그 이전에 그룹으로 볼 수 있 는 ‘노래마을’ 이 있었지만 음악 분야에서 그룹은 늘 있었던 것이라서 운동권의 조 직화로보기는좀어렵다. ‘그림미을’ 은 권오원의 통갑내기 친구 백지논이 노래미을에 영향을 받아 지은 이름이다. 그 인연으로 노래마을 앨범 재킷은 백지논이 도맡아 그렸다. 그림마을은 시작할 때는 조직이 아니었다. 백지논의 작업실 이름이 그림마을이었다. 그런데 경 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미술대학 출신 서대성이 성남에 민중 미술을 하는 화가가 있 디는 것을 알게 되면서 조직의 형태를 띠게 됐다. ‘다영글’ 은 1987년 가을에 노동자 대투쟁을 겪으면서 김성만이 꾸렸다. 모임 겸 연습공간으로상대원동건물지하에다영글이란이름의술집을차렸다. 풍물의 경우 전순필이 YMCA와 만남의집 등에서 전통 예술을 펼치던 인력들을 모아 ‘도움소’ 를 창립했는데 1996년 ‘솟대’ 가 발족할 때는 터사랑청년회’ 풍물 동아리에서 기량을 연마한 진재선 퉁이 가세하기도 했다 노동자문학회와 노동자문화마당은 운동권 대학생 출신들이 계획적으로 꾸린 단 체였다. 두 단체의 핵심 활동가들은 노동자들이 중심으로 우뚝 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끝까지 대학생 출신 활동가중심으로운영됐다. 성남연합 결성을 계기로 ‘성문연’ 을 꾸렸다. 이때 다영글이 빠진 것은 김성만이 노동운동의 독자성을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성문연은 의장, 사무국장, 정책실장등 조직 체계를 갖췄다. 그러나 회의를 상설화하지는 않았다. 성문연 자체 재정이 없 었으며, 살림은 단체별로 따로 꾸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가 초대 사무국장을 맡긴 했지만 실질적으로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성문연을 꾸렸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성문연 이전에도 연대 활동이 활발했고, 일이생겼다하면연석회의를열어 ‘뚝딱’ 행사를 치렀다.성문연을결성하고난뒤 의 일 처리 방식도 똑같았다. 성문연은 1990년대 중반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세월 326 재7권 민주주의 민주화운동과시민사회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