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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남의통일운동 1980년대 들어와 민주주의와 민주회를 위한운동은 민족운동과 계급운동의 새로 운차원을열었다.여기에결정적인계기를제공한것은 1980년 저울의봄’으로상 징되는 민주화운동과 광주 민중항쟁, 그리고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한 이른바 신군 부정권의 등장이었다. 신군부정권의 등장과정에서 미국의 역할과개입이라는문 제가 공공의 쟁점으로부각되는 한편, 분단 현실과 관련하여 미국을 민주화를가로 막는 장애로 이해했던 1970년대 후반의 인식과 결부되면서 이 시기 이후 미국에 대 한 비판과 저항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1948년 분단 정권의 수립과 1950년의 한국전쟁 이후 미국 패권의 직접적인 영향 력 아래 놓여 있었던 상황에서는 모든 운동을 기본적으로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해 석할 수 있는 소지가 항상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민 족운동이 이전과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제국주의론에 의거하 여 미국을 파악하는 한편,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북한 체제와의 관련하여 이해하려 고 시도하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1982년 3월에 있었던 부산 및 광주의 미문화원 점 거 사건, 곧 이은 강원대 학생들의 성조기 사건, 또는 팀스프리트 반대운동 등은 ‘미 제국주의’ 에 대한 투쟁의 서곡이었으며, 1985년 5월의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 성 사건은 반미자주화운동의 ‘획기적 사건’ 이었다. 이와 아울러 분단 이후 토론과 실천의 장에서 금기시되어 왔던 ‘북한 바로 알기’ 가 운동의 형태를 띠고 전개되기 시작하였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더불어 주체사상이 남한의 변혁운동에 가지 는 적합성의 문제가 진지하게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민족 문제가 전면적 으로부각되면서, 이에 대한논의와 인식이 심화되었던 것이다.36 민족 문제와 통일 문제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전국 차원의 민주회운동에서 흔히 제기된 쟁점이었지만, 지역 차원에서는 당면의 실제 문제로서 구체성과 적합성을 가지고 실행되기에는 당위적이고 추상적인 성격을 가진 목표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정에도불구하고 다른 지역과는 대조적으로 성남 지역의 민주화운동에서는 민족 과통일의 주제가지속적으로제기되어 왔다는점이 주목된다. 이른바민중민주(PD) 계열이 아닌 민족해방(NL) 계열이 우세한 학생운동의 전통37과 아울러 주민 구성에 36김경일, r한국의 근대와근대성』, 백산서당, 2004, 293쪽, 32 제7권-민주주의 민주화운동과시민사회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