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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마을 고 (故) 권오원(출처 솟대) 노래마을백창위 출처 솟떼 김석영은 1990년대에 접어들 어 ‘그림마을’ 에 합류했는데, 그가 그림 수업을 받 았던곳은중%덕장이었다.따라서 김석영의 경우에는스승이 있었다. 영화간판을 그리는 일에 마스터가 스승, 김석영은 보조를 하다가 순수 회화를 하고 싶어서 극 장을그만뒀다고했다. 풍물은 1970 년대 대학가에분민족문화복구바람에 힘입어 널리 퍼졌다. 대학에 전공학과가 개설되지 않았으으로 정규 교육은 논할 거리가 못된다. 단 안정적으로 악기를두드릴 공간은 있어야 한다, 초기에 종교 기관이 그 공죠낼제공했다. 주민교 회, YMCA,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만남의집 퉁 풍물패 ‘도움소’ 의 상쇠 전순필의 경 우YMCA에서익힌기능으로만남의집에서노동자들에게기능을전수하기도했다. 3) 지역문화인력 서 예가이며 ‘긴뱃’ 을 아호로 썼던 권영환은 1983년부터 성남에 살다가 1985년 감전 사고로 오른팔이 절단되고 왼팔도자유롭지 못한 아픔을 겪었다. 다행히 목숨 은부지했지만서예가로서의삶은끝인듯했다.그러나권영환은좌절하지않았다. 불편한 왼손으로 붓을 쥐고는 피나는 노력을 했다. 수정구 태평동 옛 시청 앞에서 행사를 하거나 가두 행진에 나설 때는 현수막을 걸거나 앞세웠다. 그 현수막의 문 구를 그가 직접 썼다. 그는 장애인임에도 가두시위 때 상당히 과격한 편이었는데, 특히 통일운동의 열정이 강했다 2010년 후두암으로 인생길 60년 여정을 마감한 권 영환은통일을주제로자신이쓴시와김남주시인의시를유품으로남겼다. 318 제7권 민주주의-민주화운동과시민사회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