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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남의 열악했던 문화 시설 분당구는 서현동 시범 단지가 완공된 1990년대 초에 주민들의 입주가 시작되었 다 공동체 형성에 걸리는기간을고려했을 때 지역 문화운동이 활발했던 1980년대 와 1990년대에는 거의 결합하지 못했다. 그래서 분당구는 전체적으로 다룰 대상에 서 제외할수밖에 없었다. 수정구와중원구의 경우에도 1970년대는다루지 못했는데 분당구와 마찬가지 이 유이다. 공동체를 형성해야 비로소 지역 단위 운동을 얘기할 수 있는데 그 조건이 미흡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광주대단지가 상징하는 것은 가난이었다. 1980년대 서울시와 성남시의 경계 지 점, 현재의 분당선 전철 복정역 인근에는 거대한 인력 시장이 있었다. 새벽에 약 500명 정도가 운집했다. 전국 최대 규모 인력 시장이었다. 매일 일거리를 구해야 하 는형편의사람들이많았다. 당시 성남시 인구는 40만 명에 이르렀지만 영화 개봉관이 두 군데뿐이었다. 중앙 극장과 성남극장, 이외에 문화 공간이라 이를 만한 데는 없었다. 다방이 많기는 했 다. 설업자와 일용직 노동지들이 시간을 때우는 공간이 다방이었다. 그런데 다방보 다더많은건교회였다 대부분소규모였는데,교회에가면사람을사뀔수있었다. 티관객지이면서 다들 어렵게 사는 형편에 믿고 의지할수 있는사람의 존재는 매 우소중했다.즉교회는공동체를형성하는공간이었다. 성남의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제대로 공부할수 있는학교나 시설도 많지 않았다. 문화운동 1세대들은 대학 전공 학괴를 이수하지 못했다. 1986년 1집 음반 「노래마 을사람들」로 시작한 단체 ‘노래마을’ 은 작곡가 백창우와 통기타 가수 고故 권오원 이 의기투합해 결성했다. 두 사람 공히 음악대학에 적을 둔 적은 없었다. 백창우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음대는 무슨! …--- 니는 개인적으로 중학교 때부터 직곡하기 시작했어. 선생님이 따로 있 었던것은아니었고하니까되더라구. 제2편-공정사회를위한실천,시민사회 활동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