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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5월 ‘어린이날한마당잔치’는시에서 예산을지원하고지역시민단체와노동 운동 단체, 대학생들이 모두 참여하여 함께 행사를 꾸미고 한마당 잔치를 펼침으로 써 연대 사업의 모범을 창출했으며, 이후 연대 사업의 외연을 확장하는 성괴를 낳 았다. 그러나 이 시기는 예상보다 해직 교사의 수가 많아지면서 생계 대책이 주요 현안 문제로 대두되었다. 생제비 지원의 대부분은 현직 교사의 후원금과 일부 성금에 의 지했으며, 이외에 재정 사업으로 충당했으나 현실적으로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 고해직 교사의 삶은갈수록피폐해졌다. (2) 현장 교사들의 눈물겨운 헌신 전교조 결성 초기 현직 교새 가 아닌 현장 교샤 라 불린 교사들이 존재하였다. 1989년 대량 징계 사태 이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를 굳이 현장 교사라 고 일컬은 것은 해직당한 ‘현장 밖의 교사 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현장 교사는 전 교조교사대량해직 상태 속에서 이러저러한사연으로학교에 남기를선택한교사 들이다. 이들은 마음을 짓누르는 자기 부채 의식과 싸워야 했는데, 한 해직 교사는 “몽은학교 안에 있지만 마음운 천 리 밖을 헤매며 괴로워했던 현장교시들이 없었다 면 해직 교사들도 그 인고의 세월을 견디기 몹시 힘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즉 해직 위협의 엄혹한조건에서도다른교사들을설득하여 해직 교사후원금을모금하는데 헌신적으로 활동한 상원여지중학교와 문원중학교를 비롯한 여러 여교사들의 눈물 겨운헌신이 있었기에해직교사들도인고의 세월을지탱할수있었다는것이다. (3) 해직 교사의 조건부 복직 김영삼의 문민정부가등장하는 1990년대 초 전교조는 이미 작지 않은세력과 영 향력을 형성한 데다가 대량 해직 사태가사회적으로도 중요한 문제가 됨으로써 정 부로서도 전교조 해직 교사 문제를 외면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이처럼 전교조가 교육계의 대안세력으로 일정 정도자리를잡으면서 김영삼정부는전교조해직 교 사에 대해 ‘조건부 복직 방침’ 을 제시하였다. 이에 전교조 지도부는 ‘교육부의 방 침을 수용하는 차원’ 이 아니라 ‘전교조 합법화와 해직 교사 원상 복직을 앞당기기 위해 가능한 최대 다수의 해직 교시들이 학교 현장으로 돌아가 학생 및 학부모와 더불어 생활하면서 참교육 실천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정해숙 위원장의 특별 담회문 290 제7권 민주주의 민주화운동과시민사회 활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