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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단체에서는 인천 등 수도권을중심으로 도시산업 선교와 빈민 선교에 나서게 되 었다. 사건 직후 개신교 사회운동 단체와 서울대, 고려대 등의 현지 조사로 광주대 단지 실태가 외부에 알려지는 과정에서 대학생들이 지역에 들어와 아학 활동을 벌 였다 1971년 연세대 신학과 4학년 최규성이 연세대 노정현 교수의 도시 빈민 프로그램 에 영횡t을 받아 야학을 시작한 것이 이후 제일실업중고등학교로 발전했고, 그 밖에 대학생봉사단 그룹(대봉 그룹)을 통한 야학 활동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기운데 봉사 활동을 넘어선 본격적인 사회운동의 출발은 이해학 목사의 주민교회 로부터시작되었다고할수있다. 1973년 한국 특수지역 선교위원회는 ‘광주대단지 사건’ 으로 드러난 성남 지역 도시 빈민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성남 지 역 민중 선교를 위해 이해학(1980년 목사 안 수) 전도사를 파송하여 교회 설립을 준비하게 하였다. 1973년 3월 1일 설립된 주민 교회는설립 초기부터 명성의원 의료선교활동을포함해 도시 빈민과노동지를위 한 선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또한 주민교회는 민주회운동에 따른 이해학의 수차례 구속과 함께 성남 지역 민 주화운동의 본거지로 기능하였으며 이 중 노동자, 빈민운동의 산실이 되면서 수많 은사회 운동가를길러냈다. 주민교회와함께 1970년대와 1980년대 성남지역사회 운동가를 배출한 곳으로는 만남의집과 성남YMCA를 들 수 있다. 만남의집은 1978 년 성베네닥토수녀회 소속의 소피아수녀가 ‘노동시목을 위한 공간’ 으로 설립하였 다. 주민교회가 광주대단지 철거민 등 빈민 문제에 주목하여 설립되었다면 만남의 집은 당시 확장되고 있던 성남공단의 영향이 컸다. 만남의집은 설립 이후 노동자 생존권 확보 투쟁에 주력하면서 야학운동 등을 지원 · 운영하였다. 주민교회가 빈 민운동에서 시작해 민족민주운동의 거점이 되었다면 만남의집은 노동자들의 쉽터 이자노동운동기들의 산실이 되었다. 한편 1981년 2월 창립된 성남YMCA는 민족민주운동 및 노동운동을 직접 주도하 지는 않았으나 여러 부문의 활동가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였고 문화운동 가들을다수배출하였다. 제2펀 공정사회를위한실천,시민사회활동 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