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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곳곳에 배치되어 중산층을 위한 쾌적한 교외 주거지 성격을 지닌 신도시이다 판교신도시는분당구판교동 백현동 삼평동 운중동 하산운동일대에 2003년에 건설되기 시작해 최근까지도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신도시이다. 분당과 판교는 수 도권의 대표적인신흥중산층거주지로분당의 경우한때 ‘천당밑에분당’ 이라했 을정도로쾌적한주거환경을자랑했다.판교는서울로의접근성과자연친화적도 시 환경에 기반을둔중산층거주지뿐만아니라신흥부촌으로도각광받고 있다. 성남시의구시가지와신시가지는이렇듯지리적으로단절되었을뿐만아니라소 득 수준에서도 현격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도시 건설 측면에서는 구시 가지가 재개발이 진행 중이거나 계획 중인 곳이라면 분당 신도시는 개발이 완료된 곳이고, 판교 신도시는 최근에서야 개발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지역이다. 이처럼 세 곳의 시가지는 소득 수준에 따른 인구 구성과 개발 양상의 차이 때문에 시민사 회운동의 지향과 성격에서도 커다란차이를보이고 있으며 ‘1공단 공원화’ 등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신 · 구시가지 주민들의 이해가나눠지기도 했다. 2) 광주대단지 사건과 민주화운동 역량 성남시 구시가지는 두 번에 걸친 사회적 차별과 배제로 도시 전체가 빈곤 지역, 우범 지역의 대명사가 되었다. 첫 번째 차별은 광주대단지 건설 자체에 기인하며 두 번째 차별은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 발생했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1970년 11월 전태일의 분신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압축적 산업화 정책과 ‘선성장 후분배’ 의 수탈적 개발 독재에 대한 생존을 위한 1970년대 대표적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 이후 성남시는 ‘산모가 아기를 갈J 아 먹는’ 곳으로 전해지면서, 외부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광주대단지에서 성남시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사회 적 차별과 배제는 이후 성남시가 민족 · 민주 · 민중 운동의 지역 거점화히는 배경 이 되는한편축적된운동 역량이 1990년 이후시민사회운동의 형성과성장에 커다 란 영횡t을 미치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광주대단지 사건이 생존권 쟁취를 위한 도시 봉기의 형태를 띠었지만 그 자체가 이후 목적의식적 운동으로 전화 轉化하지는 못했다. 광주대단지와 성남시의 운동 조 직의 형성은 외부로부터 주어졌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노동 문제, 도시 빈민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일부 기독 196 제7 권 민주주의-민주 화운동과 시민사회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