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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병사로 인해 1993년에 문을 닫았다. 이후 시에서 생협 명칭을 처음으로 시용하며 등장한 것이 ‘주민생협’ 이었다. 주 민생협은 주민교회의 ‘생명 문화 창조’ 운동의 일환이었다.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 괴, 먹거리 안전에 대한 각성을 하면서 1989년 12월에 주민교회 여신도 34세대가 중심이 되어 도농 직거래 사업으로 출발하였다. 초기에는 ‘이천애농회’ 의 유정란 과 김장 배추, ‘두레방’ (의정부 기지촌 여성 공동체)의 빵, 여신도회가 만든 참기름, 여주 지역 교회의 쌀, 홍성 풀무협동조합의 장류 등을 공동 구매하여 직거래하는 형태였 다. 점차조합원이 확대되면서 전문적인 경영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대학을갓졸업 하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서 활동가로 일하던 교회 청년 최민경을 설득하여 1990년 12월에 일본 ‘생활클럽생협’ 으로 1년간 연수를 보냈다. 그는 1991년 말에 일본에서의 생협 연수에서 돌아와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생협을 준비하여 1993년 1월에 정식으로 주민생협을 창립(이사장장건)하였다. 창립 초기 주민생협은 일본 생활클럽생협의 운영 시스댐인 무점포(예약주문생산) 방식과 공동체반班 공급 시스템을 도입하여 조합 운영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 력하였다. 그러나 점차 조합원이 늘어나고 공급 지역이 확대되면서 조합원의 요구 에 따라공급권역(수정구,중원구,분당귀마다거점 매장을개장하였다. 무점포 예약주 문에서 매장 판매로 이용 방식이 바뀌면서 관리 운영비가 증가하였으나, 때마침 안 전 · 안심 친환경 먹거리와 건강 등 소위 ‘웰빙’ 바람이 불면서 조합원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오히려 성장기를 맞이하였다. 이와때를같이하여주민생협은지역생협으로서의자신감과정체성을나타내기 위해 2007년 5월에 생활재 관련 물류 사업을 독자적으로 하기로 결정하면서 두레생 협 연합 물류에서 탈퇴하였다. 그리고 독자 물류 센터를 갖추고 생산지를 확보해 나갔으나 조합원 증가에 비례하는 생활재 공급이 이뤄지지 않아 결품 사태가 빈번 하게 일어났다. 이로 인해 조합원의 이용이 감소되고 조합 탈퇴자가 생기면서 경영 의 위기 에 봉착하였고, 결국 2012년 8월에 독자 물류 시스댐을 포기하고 두레생협 연합의 회원 생협으로 재가입 하였다. ‘생활과 협동’ 운동으로서 주민생협의 조합원 활동과 생활재 · 환경 · 마을 · 교 육등의 위원회 활동,그리고지방자치 정부에풀뿌리 시의원을파견하는대리인 운동 등은 지역 사회에 잔잔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다른 협동조합과든 달리 조 합원 대부분이 주부 등 여성으로 조직된 생협은 먹거리 · 환경 · 육아 · 교육 · 경 제1편-정의사회를위한행동, 민주화운동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