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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빈민운동단체 (1) 주민교회 8 ’ 10 광주대단지 사건은 대단지 입주자들의 참혹한 빈곤상 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수도권 특수 지역 선교위원회’ 박형규 목사가 위수령 파동으혹 한신대학 에서 제적당한 이해학 전도사를 파송하면서 성남 지역에서 최초로 빈민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해학 전도사는 1973년 1월 수진동 41 앓호에서 지 역 주민 12명으로 첫 예배를 드리고, 3 월 1일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주민교회를 창립하였다. 주민교 회는 창립 후 길거리에 방치된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어린이 자치회를조직하고 ‘주민독서실’을운영하면 서 책읽기와독 서실을 꾸미기 위한 폐품수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해학 전도 λ 까 유신 독재에 항거하며 긴급조치 1 2 호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 다 구속되면서 주민교회의 빈민 선교 활동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런 와중에 도 주민교회는 1974년 1월 ‘실업자 대책위원회’ 를 구성하고 지 역의 실업자들을 조 직하여 취로사업에 지속적으로참여할수 있도록지원하였으며, 시 당국을압박해 특별 예산을 배정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1975년 4월에는 직업 상담설을 운영 하고, 5월에는 주민 의료 협동회를 결성하였으며, 7 월에는 노동자를 위한 0 댐 학 교를 개설하는 등 지속적이고 활발한 빈민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의료 협 동회는 의료 협동조합을 목표로 서울대학교 사회의학연구소(회장 양요한 의새와 뜻 있는 한의사(최형주 원장)가 참여하여 주 1회 무료 진료를 하였으나 1976년 당국의 강 제 해산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한편 직업 상담실 운영을 통해 교육의 필요성을 절 감하고 사회 교육의 장으로 노동자를 위한 。낭 학교를 열고, 문맹 여성들을 위해 서는한글교실과우리말글쓰기를히는 ‘마실터’를열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협동 경제 운동으로 신용협동조합도 설립하였다. 추운 겨 울날집세를 내지 못해 길거리로쫓겨나 앉을가난한과부와아이들의 문제를해결 하기 위한 방안으로 1979년 12월에 교인(조합원) 47명이 4만 7000원을 출자하여 주민 교회신용협동조합(이사장 김금용)을 설립한 것이다. 주민교회신협은 ‘주민과 함께 사 는주민 공동체’ 의 지역 사회 선교사역의 하나로서민들의 대안금융으혹자리매김 주민교회 현판 식 후 기념촬영 한 이해학 목 AK1974) 제l편-정의사회를위한행동 ,민주화운동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