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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계기가되었다. 하지만 자안별조직화’와 ‘직업별조직화’가가지는지속성과총체성의한계를 인식한 1980년대 후반에 빈민 지역의 주민 운동론이 다시 주목받게 된다. 이는 빈 민지역에서 비교적 안정적이고다OJ한주민들의 참여를조직할수있는방안이 지 역주민운동이기 때문이었다. 1989년무렵, 빈민지역주민운동의 재정립을주창한 그룹들은지역의 ‘위원회’ 형식으로대중조직을건설하그 l자하였다. 이들은다양 한 공간과 역량별 · 직업별 · 취미별 · 계층별 소모임을 포진시켜 중앙 조직을 보호 하고, 나。까 주민의 경제적 · 정치적 · 문화적 이해를 성실히 대변하는 제반 활동 을 벌임으로써 해당 지역 주민의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 내고자하였다. 2. 성남의빈민운동약사 1) 광주대단지 사건과 빈민운동의 태동 성남시는 박정희 정권 개발 정책의 산불이다. 1966년부터 서울시는 청계천변 동 시가지 내에 있는 무허가 건물을 없애기 위하여 신도시 건설을 추진하였는데, 그 규모는 무려 100만 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9917만rn'(3때만 평) 규모의 신도시 건설 계획이었다. 하지만 서울시가 겨우 두 쪽의 계획서로 확정 발표한 「대단지 주 택지 조성 계획」은 위치 선정이나 세부 시설조차 확정하지 못한 부실한 계획이었 고, 1968년 5월 7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지구 일단의 주택지 경 영 사업 계획」으 로건설부의 인가를받았다. 이 계획은불과 991만rn'(300만평)의 토지에 10만세대 55 만 명의 철거민을 3년 내에 이주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이렇게 계획은 추진되었고, 1969년 3월 4일본격적인 정지 작업의 착수와함께 철거민들의 입주가시작되었다. 입주할 주택은커녕 정지 작업도 마무리되기 전에 임시 천막에 ‘가수용假收容’ 이란 명목으료 입주가 대거 이루어졌다. 이 같은 부실한 사업은 8 . 103장주대단지 사건을 예고하기에 충분하였다. 1%9년 서울의 철거민들이 광주대단지로 첫 입주를 시작한 이후에 철거민들과 타 지역 도시 빈민들의 이주는 계속되었다. 5만여 명의 군중이 모인 1971년 8월 10 일의 광주대단지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3 년 동안 가구수는 2만 7897세대, 인 제1판정의사회를위한행동,민주화운동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