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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노백린(1875.1.10~1926.1.22) 건국훈장 대통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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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백린은 황해도 송화(松禾)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뛰어나서 장군감이라고 촉망받았다.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상경하여 1895년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윤치성(尹致晟)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경응의숙(慶應義塾)을 수료하였다. 이어 1898년에 성성(成城)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해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900년에 귀국한 그는 육군 참위에 임관되어 한국무관학교 교관이 되어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뒤 정령(正領)까지 승진하였으며, 육군무관학교장, 헌병대장, 육군연성(硏成)학교장, 군부(軍部) 교육국장 등으로 한국군 육성에 주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기울기 시작한 국권은 1907년 마침내 군대를 해산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는 실의와 비운을 안은 채 조국의 운명을 안타까워하였으며, 1906년에 안창호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안태국(安泰國)·이동녕·이동휘·조성환·신채호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만주에 독립운동 전초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또한 그는 고향인 송화(松禾)에 민립학교 광무학당(光武學堂)을 설립하고, 이어 1908년에는 김구(金九)·최명식(崔明植)·김홍량(金鴻亮) 등과 함께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여 구국교육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마침내 국권이 침탈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0년 6월 그는 박용만(朴容萬) 등과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지방에서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여 김성옥 허용과 함께 별동대 주임으로서 3백여 명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동년 4월 10일 군무부 총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승만·안창호·박용만·이동휘·김규식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