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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모임을 만들어 밤마다 국권 회복을 논의했던, 박계술.조효제.박삼칠.정각린.강삼문.문재규 등도 그날의 만세에 합세하였다. 14일에는 성내리에서 군중들과 더불어 만세를 불러 독립에 대한 열망이 도도하게 곤양에 퍼지게 하였다. 이후 곤양의 주민들은, 이 만세의거에 대한 강건한 의지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4월 6일, 4월 19일에는, 곤양 보통학교 생도들이 김진곤 등과 더불어 곤양 시장에서 군중을 이끌어 만세를 부르며, 독립의 정신을 이어 나갔다. 일제는 역사.문화적으로,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자긍심이 이어져 내려온 곤양면민들을 강압과 폭력으로 의거를 혹 짓눌러 보기도 하고, 협박과 회유로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하였으나, 곤양에서 퍼지는 독립의 강건한 의지는 막을 수 없었다. 오히려 곤양을 최초로 서부 경남 전역으로 만세의거가 펼쳐져 나갔다. 서포 율포리 출신 최범술은 해인사에서 최원형 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우편으로 전달받아 송지환.신영법.임응주.송찬홍.이주효.송용수.박우미동 등과 독립 의거를 주도하면서 3월에 곤양 장터에서 군중과 더불어 만세를 불렀다. 4월 10일과 4월 16일에는 서포 개진학교 생도와 주민들과 더불어 서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하였다. 곤명 금성리에서는 이영근이 최범술로 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4월 5일, 문양근.이영근.정원주.조개석.조관석.강재빈.이규현 등과 협심하여 금성리 주민들과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17일에는 김경찬 등 주민들이 옥녀봉에서 만세를 불렀다. 오사제에서 정복와 외 많은 사람들의 만세의거가 있었다. 기미년 곤양의 항일정신은 여러 방향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맥사리 출신 최원형은 경성고보 학생으로 최범술에게 독립선언서를 우송하고, 서울에서 3.1 독립만세에 참여하여 고초를 당하였다. 그 뒤 임시정부에 자금조달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성내리 출신 조우제는 곤양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