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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이 1차 학생시위를 진압하고, 주동자를 유치한 후, 방심하는 사이 3월 4일의 만세시위 진압이 자극제가 되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5일에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그 규모는 컸었다. 주로 학생들에 의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었고, 체포를 면한 기독교 학교인 영명 남학교, 멜본딘 여학교 교사와 학생, 구암 예수병원 사무원, 구암교회 교인 등이 합세하면서, 백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500여 명으로 늘어나 성난 노도와 같이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계속되었다. 군산3.1만세운동은 28회(31,500여 명 참여/피살자 53명/부상자 72명/투옥자 195명)로 큰 상처를 남겼지만, 당시 일본 군대가 주둔하고 있든 일본인 득세 중심의 도시 속에서 자주독립의 확고한 의지를 힘있게 알리며 꽃피운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3.1만세운동(1919년 3월 5일 거사)"은 자랑스런 우리고장 군산의 불씨가 되었던 거사다. 이로 인해 대구복심법원에서 군산 3.1만세운동에 앞장섰던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교사 4명, 학생 11명, 병원 사무원 9명, 교회신자 2명, 시민 8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