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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선은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충남 청양군(靑陽郡)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1백여 명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 때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30여 명의 시위 참여자를 강제 연행해 가자, 분노한 시위군중은 피검자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를 주도하던 목면(木面) 안심리(安心里)에 거주하는 향교 직원 권흥규(權興圭)가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자, 일본 헌병은 공포를 쏘아대며 권흥규를 제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앞가슴을 풀어 헤치고 달려들며 더욱 거세게 항의하자 일본 헌병은 야만적으로 그의 가슴에 발포하여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튿날 아침, 시장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고향 집으로 운구하는데 1천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다. 이 때 공주에서 지원 나온 일본 헌병들이 운구행렬에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교선은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22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청양헌병분견소에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태형을 받은 인사는 그를 비롯하여 166인이나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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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용은 충남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정산면에서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5일 장날에 시작되었다. 오후 3시경 장터에 모인 1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 헌병이 30명을 강제 연행하자 7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헌병주재소로 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헌병이 발포하여 목면(木面) 안심리(安心里)에서 정산시장 만세운동에 참가한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 권흥규(權興圭)가 적의 흉탄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지고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다. 다음날 6일 아침 시장 사람들이 시체를 인수하여 고인의 댁으로 운구하는데 1,000여 명이 뒤따르며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때 일본 헌병들이 다시 운구 행렬에 발포하여 고인의 조카딸과 상여꾼 등 6인이 순국하였다. 이후 검거가 시작되어 많은 사람들이 붙들려 태형을 받았다. 이병용도 이 때 체포되어 1919년 4월 21일 청양헌병분견소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