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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오르시어 해평윤씨를 조선조 대문벌의 반열에 올려놓으신 현조로서 오음공파(梧陰公派)의 지파조(支派祖)이시다. 13세조 휘 훤(暄) 공은 평안도 관찰사를 지내셨고 백사(白沙)가 호이시어 이하 후손은 충간공-오음공계-백사공파로 불리우고 있다. 오음 휘 두수공의 10대 손인 공은 1856년 9월 20일 고(考) 휘 치혁(致赫)공과 비(妣) 창녕조씨(昌寧曺氏) 슬하의 3남중 2남으로 태어나셨으나 형 휘 규선(圭善)공이 백부께 양자 가심으로 장자가 되셨다. 평소 온화하셨으나 불의에는 직언을 아끼지 않는 성품이었고 이웃의 어려움에는 베풀기에 망설임이 없었으며 사필귀정의 명제를 한 시도 잊지 않는 분이었다고 연로하신 어른들의 증언과 칭송으로 전해오고 있다. 국권을 상실한 비탄지절에 공의 우국지심은 기미 1919년 청양군 화성면 모듬내-합천-현, 화성장터-에서 대한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으로 분출되셨으니 마을청년들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만들고 나누어주며 5일 간격의 장날마다 수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을 주도하셨다. 또한 오서산 주변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오서산 능선에서 횃불을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시다가 그해 4월 5일 일본군 헌병들에게 체포투옥되시어 온갖 고문과 고초를 겪으시니 공의 나이 55세이셨고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27년 1월 4일 졸하시니 향년 63세이셨다.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