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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9월 18일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9월 그믐 예산을 비롯한 내포지역도 2차 봉기인 동학혁명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내포동학의 조직인 덕포 박인호 예포 박덕칠의 농민군은 삽교성리에 예포 배도소를 설치하고 해미 온양 덕산등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확보하고 10월 7일 대흥관아를 점령했으나 홍주진압군이 기습적으로 예포대도소를 공격해오자 농민군은 서산지역으로 퇴각했다. 이후 관군의 무자비한 색출과 탄압이 계속되자 농민군은 운산 여미벌에 재결집 면천 승전곡에서 일본군 정예부대를 대퇴시켰다. 사기충전한 2만여 농민군은 구만리를 거쳐 오가역창리에 주둔하고 서울공격을 위해 10월 25일 이곳 관작리에 주둔했다. 다음날 아침 홍주진압군은 농민군을 향해 포공격을 갸시하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숫자가 우세한 농민군은 일시 흩어졌다가 포위공격하여 진압군을 패퇴시켰다. 늦게 오던 일본군서로제2중대는 오가에서 패퇴하는 진압군과 함께 홍주성으로 퇴각하고 농민군은 곧바로 예산관아를 점령했다. 한나절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진압군중군대장 김병돈 영관 이창욱과 수백여 유회군이 전사했고 군량미를 대주던 간량리 출신 농민군 박응하선생이 목숨을 잃어 농민군보다 진압군 희생이 컸다. 농민군대승전지로 기록되는 관작전투는 당시 참여했던 농민군지도자 조석헌 문장준선생의 '역사일기'에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보국안민 제폭구민 기치들고 일어선 농민군의 폐정개혁을 수용못하고 외국군에 의존했던 무능한 조정이 농민군을 무차별 탄압했기때문이다. 관작리 전적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세상을 열망했던 동한농민군과 '토벌'이란 시대의 부름을 받고 참여한 진압군 사이 서로 죽여야만 했던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요한 동학유적지가 아닐수 없다. 2010년 10월 일 글 묵암 박서묵 글씨 덕천 박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