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page


18page

곽한일은 다시 소모장(召募將)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윤 4월 9일(양 5월 31일) 적의 대공세로 홍주성이 함락되고 일부 인사들은 성을 탈출하여 재기를 계획하는 데 심혈을 경주하였다. 홍주성 함락 후, 곽한일은 최익현의 순창(淳昌) 의진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이미 면암 의진도 패하여 13인의 의사들이 모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였다. 그는 독자적인 거사 계획을 할 수밖에 없었다. 9월 보름 경 충남 예산 지방을 중심으로 의사들의 거사 준비 모임이 자주 있게 되고 점차 계획이 무르익어 갔다. 특히 예산읍에서 북쪽으로 10리 거리에 있는 한곡(閑谷, 지금의 大述面 上項里)에 살고 있는 이용규(李容珪)의 족형인 전 참판 이남규(李南珪)의 집에서 곽한일을 비롯하여 김덕진(金德鎭) 이용규(李容珪) 박윤식(朴潤植) 김운락(金雲洛) 황영수(黃英秀) 정회규(鄭會圭) 박창로(朴昌魯) 이만식(李晩植) 등 수십 명이 협의하여 다시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 때 민종식을 대장으로 추대하기로 하고 황영수 정재호(鄭在鎬)를 중군장으로, 박윤식을 운량관(運糧官)으로 곽한일과 이용규 김덕진은 참모로 임명되었다. 9월 그믐 경에는 수백 명의 건장한 군사들을 예산읍 일대에 배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10월 5일(양 11월 20일)을 기해 예산읍을 총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은신하고 있던 민종식 역시 이남규의 보호 하에 근처에 초치해 두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한곡 근처에 있던 일진회원에 의해 기밀이 누설되어 거사 계획의 일부가 일본헌병대에 알려졌다. 10월 2일 새벽 적의 기습을 받고 곽한일을 비롯하여 이남규 부자, 박윤식, 이용규, 이석낙(李錫樂) 등이 체포되었으며, 뒤이어 민종식 김덕진 성우영(成佑永) 등도 모두 체포되었다. 이로써 천신만고 끝에 마련되었던 의거 준비는 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이들은 모두 공주(公州) 경무청으로 압송되었다가 경성 평리원(京城平理院)으로 이감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듬해 7월 민종식은 사형에서 감1등하여 전라도 진도(珍島)로 유배되고 곽한일을 비롯하여 김덕진 이용규 황영수 박윤식 박두표(朴斗杓) 등은 지도(智島)로 종신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