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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일은 아산(牙山) 출신으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며, 당시 서세동점(西勢東漸)과 일인의 국정간섭으로 국운이 날로 쇠하여 가는 것을 항시 근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1906년 2월 남규진(南圭振)과 더불어 면암을 뵙고 지도 해 줄 것을 청하였다. 면암은 곽한일에게, "호서(湖西)의 일은 내가 그대에게 의탁하는 것이니 그대는 남규진과 함께 대중을 격려하여 하루 속히 군사를 일으켜 영호(嶺湖)와 더불어 기각의 형세를 만들도록 하여라. 만약 일이 뜻과 같지 않으면 남으로 내려와 나와 함께 일을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리고 도장을 새겨 주어서 사방에 호소하고 군중에게 명령할 때에 쓰는 병부로 삼게 해 주었다. 즉 곽한일이 하는 일은 면암의 명을 받아서 수행하는 것이라는 권위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아울러 격문과 존양 토복(尊攘討復)의 기호를 곽한일과 남규진에게 주어 스스로 나아가 거사토록 하였다. 윤 4월 초 5일(양 5월 27일) 남규진으로 하여금 예산(禮山)에서 기병하게 하고 자신은 4백여 명의 병사를 인솔하고 해미성(海美城)을 점거하려다가 전 참판인 민종식(閔宗植) 의진이 홍주성(洪州城)에서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홍주로 진군하였다. 일찍이 민종식은 4월 18일 충청도 홍산 지치(鴻山支峙)에서 창의(倡義)의 깃발을 올려 행군하여 서천(舒川)을 거쳐 남포(藍浦)를 지나 4월 26일 진격하여 홍주성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때 곽한일은 남계원(南啓元) 안병림(安炳琳)과 함께 돌격장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적군의 대병력이 홍주 일대에 집결하자 민종식은 위기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시기에 윤 4월 7일 예산 지방으로부터 곽한일과 남규진이 의병부대를 이끌고 합세해 들어오니 홍주 위진의 전세는 날로 치솟았다. 한편으로 주민들을 동원하여 성첩을 수축하기도 하고 작전 부서를 일부 개편하여 전력을 확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