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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4월30일 목요일 5 (제160호) 관향조 종친회 전북김제시삼수동의 밀양박 씨 사문진사공파 삼송재 주변 에는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며 우뚝 서 있는 소나무 세 그루가 있다. 정재 선생의 평일 행세의 바 름에 감응되어 생긴 것으로 그 수는 윤리의 한그루와 중국 섬 서성 서안시 남전(藍田)의 두 소나무를 합한 것으로 정재 선 생의 충절과 곧은 선비 정신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 삼송재가 주목받고 있는 것은 그 후손들의 정성일 것이 다.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코로나19)으로인해선조의제 향을 궐향(闕享)하거나 축소하 여 지내고 있는 반면 삼송재는 지난 6~7일 양일간에 걸쳐 평일 과 마찬가지로 정성스럽게 준 비한 제수를 번갈아 진설하고, 제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제향 을 받드는 모습에서 올바른 제 의(祭儀)를찾을수있었다. 이번 제향은 삼송재 정당에 마련된 제향위(祭享位)에서 정 부 예방 지침으로 시행중인 사 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수원향교 전교(재선)를 맡고 있는 원준 前 회장과 밀성재 회장을 겸하고 있 는원주회장(영남대교수),판기부회장(김제),기옥 이사(김제), 병일 현종(간의대부공 后, 안동), 효명 감사 등 6명이 제관으로 참여해 첫날인 6일 사문진사 공을 비롯한 6위, 이조좌랑공, 소부시판사공, 7일에 는 간의대부공,정재공,6위 단소,신령감무공 순으로 각각봉행하였다. 사문진사공(四門進士公)의 휘(諱)는 원(元)으로 고려조에 사문진사(국자진사)를 역임했다. 밀성대 군(密城大君 휘 언침)의 10世 支孫(시조 39世孫)으 로太師公언부(彦孚)의둘째아들諱義臣의長子다. 유지가 밀양시 하남읍 귀명동이라 하나 전하지 아니 한다. 배위는 계림김씨이며 원덕사에 배향하였고 전 북 김제시 상동(삼수동)에 삼송재 주변에 후예 6위 와 함 께 설 단 했 다 . 사문진사공의 후예는 대대로 고려조에서 그 이름 을 떨쳤으며,6세에 이르러 휘 화(華)는 1252년에 출 생 통헌대부 밀직부사 상호군에 이르고 삼중대광 우 정승판전리사에 추증되었다. 충효로서 세인의 칭예 를 입었다. 인간(仁幹), 인지(仁祉), 인기(仁杞), 인 익(仁翊), 인우(仁宇) 등 5형제를 둠으로서 가문이 크게번성하는계기를마련했다. 정승공(휘 화)의 삼남 인기(仁杞)는 고려 때 판도 총랑(版圖摠郞)과 용궁현감(龍宮縣監), 좌우위산 원(左右衛散員)을 역임하였다. 고려 말 어지러운 정 치를 피하여 차자 휘 길(桔)과 함께 관북(함경북도 일대) 영흥에 들어감으로써 단소로 모셔져 있고, 사 남 휘 인익(仁翊)은 고려조에 간의대부(諫議大夫) 로 고려가 망함에 따라 전북 김제로 낙향 조카인 정 재공과 함께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으며 묘소가 경 내에있다. 판도총랑 휘 인기(仁杞)의 아들 휘 의중(宜中)은 두문동 72현의 한분으로 초휘(初諱)는 실(實), 字는 자허(子虛)요, 諡號는 문경공(文敬公), 아호(雅號) 는 정재(貞齋)이다. 고려 충숙왕 복위(復位) 6년 丁 丑(1337)에 태어나 공민왕 4年 乙未(1355)에 이색 (李穡) 등 22人과 같이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합격하고 서녕군(瑞寧君) 류숙(柳淑),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두분 선생문하에 종유(從遊)하여 성리학에 더욱 정진하였다. 공민왕 11년 壬寅(1362) 10月에 문과장원으로 발탁되시어 벼슬이 전의 직장 헌납 사예를 거쳐 예문관제학을 역임하였다. 이때 공민왕 16年 丁未(1367)년 성균관이 재건되어 이색 (李穡)이 大司成이 되어 경학에 통달한 정몽주(鄭 夢周), 김구용(金九容),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 宜中), 이숭인(李崇仁) 등에게 성균관 교관을 겸직 (兼職)시키었다. 그때 儒生들의 경학질의(經學質 疑)에 對하여 정밀하고 소상한 해답은 정재 先生이 으뜸이었다고한다. 1388년 5月에 국서(國書)인 철영위 철폐(鐵嶺衛 撤廢)에 관한 진정전(陳情箋)을 받들고 명나라에 들어갈 때 행장(行裝)이 검소하여 요동진무(遼東鎭 撫) 서현이 先生의 청고함에 감복하여 이 사실을 예 부에 告하니 황제는 듣고 국빈례(國賓禮)로 대우하 고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를 잠재웠다. 고려 昌王 元年 己巳(1389)에 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으 로 책봉되었고, 고려 공양왕 2年 庚午(1390) 正月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 事 종2품)가 되었다. 후에 예문관 제학 겸 성균관 대 사성에 임명되었다가 곧 이성계(李成桂)의 혁명으 로 고려는 망하고 이씨혁정당시(李氏革正當時) 즉 1392年 10月에 杜門洞에 들어갔다가 지병이 있어 숙 부인 간의대부公(仁翊)과 더불어 전라북도 김제로 퇴둔하여 후학을 가르치시며 두문자정(杜門自靖) 하니 조선조 태종이 사방으로 찾아 검교참찬의정부 사(檢校參贊 議政府事)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 아가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忠節을 지켰다.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과 경북 비안의 구천서원 (龜川書院)에 배향(配享) 되었으나 지금은 훼철되 어서 없고, 해주 송현사(海州 松峴祠), 장성 경현사 (長城 景賢祠), 파주 고려통일대전 충신각에 배향 되어 있다. 삼송재는 이와 같이 훌륭한 현인들을 모시고 있어 매년 유적탐방지로 각광받으며 많은성손들이다녀간다. 한편 제향 봉행후 가진 음복 자리에서 원준 前 회장은 제의 (祭儀)가선행되지않은제사는 후손의 도리를 망각한 것임을 알 아 야 하 는 데 요 즘 세 태 가 걱 정이라며 전통문화예절의 복원 과 이행의 아쉬움을 드러냈으 며, 원주 회장은 참여하려는 성 손들을 막아서는 속마음은 정 말 힘들고 어려웠다며 ‘코로나1 9’가 진정되는 다음해에는 종원 모두가 참석하여 축제의 시간 을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 다. 삼송재(三松齋)시향봉행 뱚뱚뱚뱚뱚뱞정성스레준비한제수에서제의(祭儀)진정한모습담겨 뱚뱚뱚뱚뱚‘코로나19’궐향있을수없어븣 삼송재 제향이 지난 6~7일 양일간에 걸쳐 봉행된 가운데 첫날인 사문진사공 이 6위 (位)의제향에 원준전 회장의 집례로 원주 대종회장이 초헌관으로 헌작하고 이어효 명감사,판기부회장이 아헌관과 종헌관,병일현종이 축관으로 독축했다. 삼송재제향에참례한 종원들이 함께하고있다.(오른쪽부터원주회장,원준前회장, 효명감사,판기부회장,기옥 이사,병일현종순) 뱚■삼송재제향위세계(世系) 삼송재전경(전북 김제시삼수동) 밀성박씨 은산부원군파 제주도종친회(회장 박경도, 입도 16세)에서는 지난 4월12일(일요 일)입도조(諱厚信)묘제를봉행하였다. 이번 입도조 묘제는 코로나19로 인한 정부 시책(대규모 집회금지와사회적거리두기)에 부응하기 위하여 평소에 참석하던 종원 들의 참여를 자제하고 임원들에게만 참여하도록 하여간소하게봉행하였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전날부터 내리던 비 날 씨가 아침 8시부터 개이고 쾌청한 날씨가 된 다고 하여 오전 10시부터 입도조 묘제를 봉행 하기로 하여 준비 하였는데 9시경부터 비 날 씨로 변하며 비바람이 심하여져서 묘제를 실 내에서 지내기로 결정하여 종친회관(제주시 애월읍 하귀2리 소재)으로 옮겨 제향을 봉행 하였다. 예정보다 10여분이 지체된 10시15분 입도조 의 선친이신 崇智선조님(漢城判尹, 銀山府院 君 諱 永均의 6世孫인 휘 密 公의 四자) 享祭 (향제)를 봉향하였으며, 10시 45분경 입도조 의 享祭를 봉행하고, 11시 15분 입도2세 德起 公부터 입도8세 恒寶 公의 享祭이 이어졌다. 이번 향제에서는 지난번 발간한 은산회보 제9 호에 게재한 묘제봉행순서를 준용하여 묘제 봉행위원회를 개최하여 헌관을 지정하였으며 홀기를사용하여제의를진행하였다. 享祭후 음복을 가진 자리에서 경도 회장은 어려운 시기에 참석하여주신 임원들에게 고 마운 마음을 전하며, 지난 1월 정기총회에서 신임 회장에 선임된 후 신임 임원진과 이사들 을 선임하여 새로운 임원들의 상견례 겸 이사 회의를 개최하려했으나 코로나19로 인하여 회의를 소집하지 못하는 점 양해를 구하였으 며,앞으로 회장 임기 중에 두가지일을 하려한 다고하였다. 첫째 새로운 종친 주소록을 만드는 일, 2003 년 은산회보를 창간하며 종친주소록을 만들 고 회보를 발송하고 있는데 종친들의 주소가 많이 바뀌면서 반송 되고 있어서 새로운 주소 록을 만들어서 많은 종친들이 은산회보를 받 아볼수있도록하겠다고하였다. 두 번째는 제주도에 밀성박씨 연합 종친회 를 창립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008년 밀성박 씨 제주도 연합 청년회가 발족되었으나 회장 단의 무성의로 유명무실하게 되었던바 이제 우리 은산부원군파 종친회가 주도하여 밀성 박씨 제주도 연합종친회를 창립하고 가능하 면 우리 종친회에서 초대회장이 추대되었으 면 한다는 희망도 피력하였다. 또한 연합 종친 회에 이은 연합 청년회의 창립도 동시에 추진 하겠다고하였다. 종원들은 준비한 음식물로 회식과 음복을 하며 정담을 나누었으며 참석 종원들에게는 약소하나마선물을드렸다. 밀성박씨은산부원군파제주입도조묘 제봉행 우천으로종친회관에서븣밀성박씨연합종친회창립주도할것 은산부원군파제주입도조시향이지난12일우천으로회관에서봉행후참례한종원들이함께하고있다. 이날 제례에제관들이 함께하고 있다. 은산부원군파 제주문중은 매년 밀성재와 은산부원군 제향에 단체로 참례하며 신라종성의 적장자 가문로서 예법을 갖추고 있어제주지역성씨문화를선도하고있다. 밀성박씨좌상공파대종회(회장 영배)는 지 난 12일 광주 북구 화암동 서석단 시향 및 중수 기적비 제막식을 가졌다. 이날 봉행된 제향은 고려 벽상공신 증 좌시중 박춘 선생을 비롯 아 드님인 찬성공(휘 인지), 손자 군수공(휘 정 손),내금위장공(휘 형손),의재공(휘 번)등 4 대 5위로 먼저 서석단에 모셔진 좌상공이하 손 자까지의 제향은 한학자 정규 현종의 집례로 초헌관 상옥(정재공 后), 아헌관 홍연(고직당 공 后), 종헌관 근호(고직당공 后) 순으로 각 각 헌작하고, 상섭(진재공 后) 축관의 독축으 로 진행되었다. 의재공 묘소에서의 제향은 정 규 집례관의 창홀에 따라 종손 행순이 초헌관 으로 헌작하고 이어 승용, 경수 순으로 헌작하 고상섭이독축을맡았다. 이날 제향은 ‘코로나19’로 인해 선산에서 가 까운 곳의 일가분만 참례시켜 신위별 헌관분 정을 않고 좌상공 제관이 이하 선조 제단에 순 서대로 분향 헌작하는 방식으로 1시간여에 걸 쳐질서정연한가운데봉행되었다. 제향 후에는 지난해 중수사업에 헌성한 198 명의 종원 이름을 새긴 표성록과 중수기적비 에 대 한 제 막 식 을 가 졌 다 . 영 배 회 장 은 이 자 리 에서 임기 3연임을 하면서 갑술보 편찬과 종중 발전에 기여한 화석 전 회장에게 감사패와 함 께 부부 은수저(99.9%) 셋트를 부상으로 전달 하고 치하한 뒤, 성원해 준 종원여러분 모두에 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지속적인 협조를당부했다. 서석단은 고려벽상공신 박춘 선생의 추모제 단으로 본보 상섭 편집국장이 지은 비문으로 소개를 대신해본다. 한편 대종회는 지난 10일 무등산 진입로 변에 서석단 입구 안내표지판 을 설치하고 서석단은 찾은 참배객의 편의를 도모했다. [瑞石壇重修紀蹟碑文] 이 서석단(瑞石壇)은 우리 선조이신 밀성대 군 13대손 고려조 벽상공신(壁上功臣) 증(贈) 좌시중(左侍中) 휘 춘(椿)과 公의 아들 증 좌 찬성 휘 인지(麟趾)와 손자 낙안·예산군수 휘 정손(貞孫), 내금위장 휘 형손(亨孫) 三世四 位의 사단(祀壇)이다. 이는 묘소를 실전(失 傳)하면 祀壇을 설치하여 추원보본(追遠報 本)하는예의(禮義)에따른것이다. 좌시중 휘 椿은 시호(諡號)가 문정(文定)으 로, 내시중과 시어사를 지낸 휘 상례(尙禮)의 아들이다. 이재 백이정(彛齋 白 視正) 선생에 게 수학하였고, 문장과 무예를 익혀 元나라에 들어가 登第하고, 한림학사가 되어 이제현·이 색과 더불어 정주(程朱)의 학설을 강론하고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고려 말 외침 이 끊이지 않아 국가가 위태해졌을 때에는 나 주목사 겸 전라도존무사, 도병마사, 응양군상 호군, 만호, 청주수원도병마사, 판밀직사사 등 의 관직을 역임하며 외적을 물리치는데 많은 전공을세웠다. 공민왕 12년(1363) 윤3月 공신을 녹훈(錄 勳 )할 때 , 公 은 1 3 6 2 년 1 월 에 홍 건 적 에 점 령 된 개경을 수복할 때의 전공으로 收復京城功一等 에, 1363년 윤3월 흥왕사 변란에 王을 호종한 功으로 扶侍避難功一等에 녹훈되어,벽상공신 (壁上功臣)으로서 공신각(功臣閣)에 존영(尊 影)이 걸리게 되었다. 공민왕 12년 5월 元나라 가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의 왕으로 삼자, 도 병마사로 임명되어 강계독로강등처(江界禿魯 江等處)에 주둔하다가 공민왕 13년(1364) 1월 에 수 주 달 천 에 서 최 영 ·이 성 계 등 과 함 께 최 유 (崔濡)의 元軍을 대파하여, 그 전공으로 판밀 직사사에 임명되고 靖難一等功에 녹훈되었다. 공민왕 14년(1365) 3월 우시중에 임명되었으 나 신돈의 모함으로 공민왕 14년 5월 광양에 유배되었고, 공민왕 15년 8월 울주군 열암사 (裂巖寺)에 유폐되었다가 암살당하고 수장 (水葬)되었으니, 유체를 모시지 못한 것이 자 손에게는 천추의 한이었다. 丙辰年(1976)에 祭 壇 을 세 우 고 祭 享 을 받 드 니 , 公 의 死 後 6 0 0 여년이 흘러서야 그 한을 달랠 수 있었다. 그 뒤 己巳年(1989)에 公의 아들 휘 麟趾와 손자 휘 貞孫의 제단을 세웠고, 甲戌年(1994)에 손 자 휘 亨孫의 제단도 세워 매년 음력 3월 20일 에제향을모셔오고있다. 세월이 흘러 제단이 퇴락되었으나 행정규제 로 인해 중수하지 못하다가 己亥年(2019)에 어렵게 인허가를 얻고 종원(宗員)들이 정성을 모아동년8월31일중수를마쳤다. 이에 정성을 함께 모은 종원들의 성명을 이 石碑에 새기니, 조상을 높이고 선조에 보답하 는 정신이 길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2020年 庚 子음 3月20日21代孫相燮삼가 엮다) /박흥식명예기자(광주광역시) 밀성박씨좌상공파서석단시향봉 행 좌상공파대종회는지난 12일서석단 제향을봉행하고이어지난해중수사업에헌성한 198명종원의이름을새긴표성록과 중수 기적비제막을갖고기념촬영을하고있다.중 수기적비는한글한문혼용으로 누구나읽기쉽게하여서석단을찾은참배객들이 서석단을쉽게알 수있도록했다. 중수사업198명 9천600만원표성비제막 영배회장(右)화석고문에게공로패를전달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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