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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 신익희선생 동상 1908년 한성외국에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들어가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 평의회장, 회장 등을 역임, 기관지인 '학지광'을 발간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고향에 동명강습소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볍률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최린, 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해외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그 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 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외무총장 대리. 문교부장등을 역임, 내무부장으로 있으면서 광복과 더불어 귀국, 김구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공작대, 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이승만과 접근하고,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 등을 겸하다가 그해 남조선과 도입법의원 대의원 피선, 1947년의장이 되었다. 지청천의 대동청년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 위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의장 이승만이 대통렬이 되자 의장에 피선, 정부수립 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한민당의 김성수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다시 국회의장에 피선되고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 발전시켜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하여 호남지역 유세 가던 중 열차안에서 향년 63세로 서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