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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3월31일 화요일 4 (제159호) 기 획 ●월정서원(月井書院) 뱚▶소재지: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2길188 (광곡마 을)▶나주시향토문화유산제16호▶배향인물:박순(朴淳)김 계휘(金繼輝) 심의겸(沈義謙) 정 철(鄭 澈) 홍천경(洪千璟) ▶ 창건연도:1659년(효종 10)▶사액서원:1669년(현종 10)▶향 사일:음력3월6일 월정서원은 원래 나주의 남쪽 입구인 광주-목포 국도변인 나주시 나주고증학교 뒤편 금성산 남쪽봉우리인 월정봉 아래 에 1659년 세워졌으며, 지명인 월정봉을 따 월정서원이라 한 다.(현재 상담비(嘗膽碑)가 있다. 1868년 서원훼철령에 따라 유허비를 세우고 설단향사(設壇享祀)하다가 1974년 현재 위 치로복설하였다. 월정서원은1659년(효종 10)사암 박순(思庵 朴淳,1523~15 89)의학덕을 흠모하는도내유림들의 발론(發論)으로 홍탁이 서원창건을청하는상소를올려허락을받아세웠다.그뒤166 9년(현종10)에 사액(賜額)이 내려졌으며, 이때 치제관(致祭 官)으로예조정랑강복원(姜復元이)파견되기도했다. 1787년(정조 11)에는 심환지, 심이지, 민종현, 이서구 등이 주력하여 서원 중수가 이루어졌고,1789년(정조 13)에는 사암 과 함께 동덕사현(同德四賢)으로서 김계휘, 심의겸, 정철, 홍 천경을 추배하려는 이 지역 유생 38인과 태학유생의 상소로 5 위가추배제향되었다.처음5위제향때에는나주목사이전모 와 최익동, 나학신이 제관으로 참여하였다. 1796년(정조 20) 강당이 중수되었고, 1802년(순조 2)에 동서재(東西齋)와 삼 문을중수하였다.당시원장은한용구(韓用龜)였고,강당이름 은 월원당(月院堂), 동재는 은구재(隱求齋), 정문은 진덕문 (進德門)이라편액하였다. 그 후 1832년(순조 32)홍석주 원장 때 2차 중수가 있었다.1 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어 옛 터에 단을 쌓고 제사지내오다 국도 1호선 확포장으로 인해 지금 장소로 옮기 게 되었다. 당시 제향과 이건 복설사업은 홍천경(洪千璟)의 후손들인 풍산홍씨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다. 1913년에는 유허비를 홍승경(洪承慶)이 건립하였고, 1974년 현재의 위치 에터를잡고사우와강당등건물을옮겨중건하였다. 현재의 서원규모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외삼문을 지나 월정서원 현판이 걸린 정면4칸 측면 1칸 팔작지붕의 강당이 있고,다시 내삼문을 지나면 정면 3칸 측면 1칸 맛배지붕의 사 당이 있으며, 경내에는 월정서원 복설기적비, 월정서원 유허 비, 묘정비 등이 세워져 있어 1796년 이건당시 세워진 묘정비 를인용해본다. [묘정비문(역문) ] 조선 명종과 선조의 치세에는 정치가 새로워지고 유학이 부흥하게 되어 태평 성대한 시대라 일컬어졌다. 조선이 개국 한지 백여년이 지난 뒤로 선열의 유업을 계승시킴이 지극히 성대하고 풍성하였지 마는 그 사이에 어찌 잡초 같은 소인배들 이 없었겠는가? 이러한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하늘이 이를 평정한 이를 평정할 인문을낳았으니박사암(朴思庵)선생으 로부터 시작하여 어진 선비들이 이어졌 다. 윤원형이 처음에문정왕후(文定王后)를끼고서사특한 마음을품고어 진선비들을해치더니, 마침그 때에문충공(文忠公)사암(思庵)박선생같 은분이 나오셔서임백령(林百齡) 같은소인에게내린시호(諡號)를까아 버렸고, 승(僧) 보우(普雨)의 요사스러움을 내쳤다. 종내는 윤원형을 내쫓 고 오래되고 잘못된 폐단을 바로잡게 되니 길거리에서는 백성들이 찬양 하였고, 조정에서는 선비들 모두가 칭송하였다. 선조께서는 포상하여 말 하기를“소나무와같은절개와지조를가졌고, 맑은물에비친달과 같이 청아한 정신을 가졌다.”고 칭송하였다. 멀리 명나라 사신으로부터는 “인 물됨을 송(宋)나라의 충신들과 같고 문장을 당시(唐詩)의 품격을 지녔 다.”고 찬탄을 받아 모든 관원들의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문장 (文章)의전형(典型)이 되었고, 재상이 되어모든정사에참여하였으니요 행이 그러한 것이 아니요당연한 소치였다. 평양(平壤)에 인현서원(仁賢書院)을 세워 기자(箕子)를 제향했고, 희천 에상현서원을세원한훤당김굉필과 정암 조광조를배향하여서도(西道, 황해·평안남북도를 통칭) 백성들로 하여금 학문을 힘쓰게 하고, 선업을 닦도록 했다. 인순왕후(仁順王后)와 공의대비(恭懿大妃)의 상에 뒤를 잇 는임금의상복(喪服)을단정했으니인순왕후에대해서는옛날 예를따를 것을청했고,공의대비에대해서는삼년복을입을것을정하였다. 태조(太祖)의가계를바로잡기위한 일로 명(明)나에사신으로 가나라 를 빛냈다는 공훈을 세웠고, 죽음에 이르러 임금으로부터 “능히 크게 쓰 지 못했다.”는 탄식이 있게 했으니, 이는 바로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1526~1582)선생이다. 소인이량(李樑)이란자가있어윤원형의자취를따르고자하여마음대 로 자식에게벼슬을주고어진선비를죽음에이르도록하니대중들이 눈 을흘기며“윤원형이 다시태어났음이라”하였다.이에임금께서발끈성 내어누가능히명령을받아사특하고정의로움을분별할것을밝혀서외 숙의 친함을 제거하고 가슴속의 마침내 조정이 안정되고 선비들이 편안 하여 크게 공번되고 사사로운 마음이 없기는 대중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 으니바로 손암(巽菴)심의겸(沈義謙,1535년~1587)이었다. 경양의 유혹에 처남을 죽여 임금의 외척을 용서하지 않았다. 김개(金 鎧)가 임금을 현혹함에 퇴계(退溪)를 옛이 간간이라 일컬은 말을 아부하 기 위한 말이 아님이라. 어찌 헤아릴수 있었겠는가? 세자를 책봉하자는 건의가기꺼워하지않는주상의속인바라될것을,역적을심문하는자리 에있으면서말을만들어비방하는자들에의해아홉번이나죽을뻔하였 으나후회람이 없는오직 마음의떳떳함이었기때문이다. 선조가귀양보 내면서 충효(忠孝)의 큰 절의로 권면했으니 참으로 신하를 아는 임금 같 은 이가 없음이라. “조정의 신하중에 으뜸이요 대권안에 사나운 범과 같 음이라.”는 임금의 성대한 포창을 입었고, 귀양을 가 백성들에게 상쾌함 을끼쳤다.비탄강개한 노래는나라를걱정함에넘쳤다.그러한 덕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형용하기에 월사 이항복 같은 이 말고 누구던가. 이는 바로 문청공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의 비(碑)이다. 정여립(鄭 汝立)은 황송스럽게도 비의 이름을 도둑질하여 시관(試官)이 되었을 때 일면식도없던허균(許筠)을선발하였으니앞을내다보기에밝았고, 인재 를수용하기에포용력이 넓었다. 일단의 즐겨하지 않은 이들이 송강(松江)을 얽어 북녘으로 유배 갔을 때에는 먼저 갇혔으며, 송강이 유배지를 옮겨갔을 때에는 과거보는 것이 금지되었다. 환란의 기미가 급박할 때에도 처신하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 다. 오직 의리에 있어서는 죽음에 이르더라도 피하지 않았으니 임진·정 유재란에건재김천일을따라의병을일으켜서강화도를지켰으며, 함재 기효증과 함께 의병의 곡식 삼천석을 의주(義州:龍灣)로 운반하였다. 글 을올려이홍노가우계성혼의무고함을변론하였으며, 원수권율장군을 도와적군을막아큰공을세웠다. 끝으로 남도(南道)의선유사(宣諭使)가 되어혜택이 일도(一道)에끼쳤다. “호걸스러운기운은 바닷물을삼켜 마 르게할듯했고,대장부의마음은하늘을지탱할동량에비겼다.세번이나 내쫓긴병든늙은이를더욱 굳게지킨절개요다섯가지나궁한 선비가어 찌 고생스러움을 말하랴.” 고 말한 이동악(李東岳)과 조현곡(趙玄谷)의 칭송은참으로 선생의진면목을그렸다할것이니, 그가바로 반환(盤恒) 홍천경(洪千璟,1553∼1632)선생이다. 나주는 사암 박선생의 고향으로 효종 기해년에 호남의 생원인 홍탁 등 이 상소하여 서원을 세울 것을 요청하여 ‘월정(月井)이란 편액을 하사받 았고, 정조 기유년에 태학(지금의 성균관)의 학생들이 황강(黃岡)·손암 (巽菴)·송강(松江)·반환(盤恒)의 네 현인(賢人)들을 함께 배향할 것을 발 의하니 진실로 예의(禮儀)에 합당한 일이라 일컬어졌다. 호남 유생 나학 신(羅學愼) 등이 예조에청하여4월14일에제향을모시게하였다. 다음해 2월 호남 유생 오휘원(吳徽源) 등이 상소하여 네 현인들의 예물(禮物)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고종 무인년에 대동훼철령에 의하여 해체되었다 가 작년 갑인년에 오현의 후손들이 다시 복원하기를 의논하여 옛 자리는 시장이 가까워 번잡한 곳으로 변했기에 시(市)의 북쪽 금안리에 자리 잡 아 건립하였다. 다음해 오월에 옛날처럼 오현을 모셔 제(祭)를 올렸다. 있 다가없어지고없었다가일어남에는운수가있음인가? 오호라 사암 박선생의 도학과 문장의 덕업(德業)은 재상 중 으뜸으로 효종의묘정(廟廷)에제일로 모셔짐이라. 그 외네분의명성과 지위와하 신 일 등은 같지는 않지마는 모두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존경하고 선 (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했음은 한 결 같이 지극 정성스런 마음에 일관되 심법(心法)은 위로는 문충공 사암 박 선생으로부터 휘광이 후세 까지미쳐동국의백성들이 나라에서사액을받아한 사당에모시고있어 가히백세를내려가도공애하고없어지지않음을알 수있다. 원근에서바 삐 모아들어 강당에 올라 강습을 하는 것은 한갓 경모(敬慕)하고 사모(思 慕)하기 때문만 아니리라. 더욱 경계하고 힘써 모든 선생들의 덕을 추모 하고 항상 좋고 싫음은 이해의 밖에 둬버리고 선(善)인가 악(惡)인가에서 만 찾는다면의리가저절로 밝아져서몸을단소하고바로잡음에거의어 긋남이 없을 것이다. 이는 바로 오늘날 다시 세우는 의논으로 구구하게 뭇 선비들에바라노라. 19 76년 병진 5월 일 후학홍석희 삼가짓고풍산홍광식이 삼가쓰다. 1)주벽-박순(朴淳,1523∼158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 는 사암(思菴).은산군사(殷山郡事)소(蘇)의 증손으로,할아 버지는 성균관사 지흥(智興)이고, 아버지는 우윤(右尹) 우 (祐)이며,어머니는 당악김씨(棠岳金氏)이다.기묘명현(己卯 名賢) 목사(牧使) 상(祥)의 조카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 인이다.1540년 사마시에합격하고,1553년(명종 8)정시 문과 에장원한뒤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홍문관수찬(弘文館修 撰)·교리(校理),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등을 거쳤다. 1561 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 호 제정 문제에 관련,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 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이듬 해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 (韓山郡守)로 선정을베풀었고,1563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 成)을 거쳐, 그 뒤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승정원동 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함께윤원형을탄핵해포악한척신일당의횡포 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1566년 부제 학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판서·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572 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이듬 해 왕수인(王守仁)의 학술이 그 릇되었음을 진술했으며,이 해 좌의정에 올랐다.그 뒤 1579년 에는영의정에임용되어 약15년간 재직하였다.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 (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널리 통했으며, 특히 븮주 역븯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에 더욱 능해 당시(唐詩)원화(元和)의정통을이었으며,글씨도잘썼다. 중년에 이황(李滉)을 사사(師事)했고, 만년에 이이·성혼 (成渾)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 나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奇大升)과도 교 분이 두터웠다.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광주(光州)월봉서 원(月峰書院),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 옥병서 원(玉屛書院)에 제향 되었고, 저서로는 븮사암집븯 7권이 있다. 시호는문충(文忠)이다. 2)김계휘(金繼輝,1526∼158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회(重晦), 호 는 황강(黃崗).아버지는 지례현감(知禮縣監)호(鎬)이며,어 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공조정랑(工曹正郎) 광원(光 元)의딸이다.장생(長生)은그의아들이다. 일찍이 경서와 사서 등을 폭넓게 읽었으며, 문장에도 뛰어 났다. 1549년 (명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해 사가독서 (賜暇讀書)에 뽑혔다. 그 뒤에도 벼슬은 올랐지만 오랫동안 사가독서를하였다. 1557년 김홍도(金弘度)와 김여부(金汝孚)의 반목으로 옥 사가 일어났을 때 김홍도의 당으로 몰려 파직되었다가, 1562 년 다시 전의 관직인 이조정랑으로 복직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중이어서나가지않았다.3년상을마치고다시벼슬길에올 라 첨정·사간(司諫)·집의(執義)·응교(應敎)·전한(典翰)·직 제학 등을 역임했고, 1566년 문과중시에서 장원을 차지해 동 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571년(선조 4) 이조참의·예조참의에 제수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황해도·전 라도의 관찰사를 거쳐 공조참판·형조참판과 동지의금부사 (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575년 동서 분당 때 심의 겸(沈義謙)과 함께 서인으로 지목된 적도 있으나, 당파에는 별로 깊이 간여하지 않고 오히려 당쟁 완화를 위해 노력하였 다.그뒤평안도관찰사로있다가1581년종계변무(宗系辨誣) 를 위한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다녀왔다.이어서 예조참판 에올라경연관(經筵官)이되었다. 우리나라의 산천·마을·도로·성지 등의 형세와 전술적인 문 제점, 농작물의 생산 현황,각 지방의 전통·연혁·씨족 원류 등 을 두루 파악해 기록으로 남겼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 되 었다. 3)심의겸(沈義謙,1535∼158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 는 손암(巽菴)·간암(艮菴)·황재(黃齋). 사인(舍人) 순문(順 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연원(連源)이고, 아버지 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이다. 어머니는 전주이씨 로증판서대(蹶)의딸이다. 족부인 감찰 홍(泓)에게 입양되었다.명종의 비인 인순왕후 (仁順王后)의 동생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5년(명 종 10)진사시에 합격하고,156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 여 청요직에 임명되었다. 1563년 사림들이 이량(李樑)으로부 터 화를 입게 되자 외숙인 양을 탄핵하며 권세와 간계를 배척 하는 등 사림의 입장을 옹호하는 데 힘썼으나 도리어 왕의 외 척으로 일을 꾸민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1564년 지평(持 平)·검상(檢詳)·사인(舍人)을 거쳐 이듬해 사간·부응교(副 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1566년 집의(執義)·군기시정 (軍器寺正)·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569년 (선조 2) 좌부승지·대사간을 지내고, 1572년 이조참의 등을 지내는 동 안 척신 출신으로서 사림들 간에 명망이 높아 선배 사류들에 게 촉망을 받았다. 이 때 김종직(金宗直) 계통의 신진세력인 김효원(金孝元)이 김계휘(金繼輝)에 의하여 이조정랑으로 천거되었는데, 김효원이 일찍이 명종 때 권신이던 윤원형(尹 元衡)의 집에 기거한 사실을 들어 권신에게 아부했다는 이유 로 이를 반대하였다. 1574년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에 발탁 되었는데, 이번에는 1575년 그의 아우 충겸(忠謙)이 이조정 랑에 추천되자, 김효원이 전랑(銓郎)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 물이 될 수 없다 하여 반대,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구세력은 그를 중심으로 서인(西人), 신진세력은 김효 원을 중심으로 동인(東人)이라 하여 동서분당이 발생하였다. 즉, 김효원이 한성부의 동부에 산다 하여 그 무리들을 동인이 라 하고, 심의겸이 서부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서인이라 하였 다.당시 정승 노수신(盧守愼)과 이이(李珥)가 사림간의 분규 가 격화될 것을 우려하여 올린 소에 의해 개성유수로 나갔다 가 전라감사를 거쳐,조정으로 돌아왔다.그 뒤 한때 낙향하여 은퇴했으나, 1580년 예조참판으로 함경감사를 역임하였다. 이 때 장령(掌令)정인홍(鄭仁弘)이그를 질투하여 탄핵을 받 았으나이이의상소로무사하여전주부윤이되었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이발(李潑)·백유양(白惟讓) 등이 일을 꾸며 동인과 합세하여 공박함으로써 파직 당하였다. 그러나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고, 세습으로 청양군(靑陽君)에 피봉 되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검소하였으며, 외척으로 있으면서 도 권세를 함부로 부리지 않았다.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 에제향되었다. 4)정철(鄭澈,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인·정치가.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 (季涵), 호는 송강(松江). 서울 장의동(藏義洞 : 지금의 종로 구 청운동) 출생.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유침(惟沈)이다. 어려 서 인종의 숙의(淑儀)인 누이와 계림군 유(桂林君瑠)의 부인 이 된 막내누이로 인연하여 궁중에 출입, 같은 나이의 경원대 군(慶源大君:명종)과친숙해졌다. 10세 되던 해인 1545년(인종 1·명종 즉위)의 을사사화에 계 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맏형 자(滋)는 광양으로 유배당하였다.곧이 어아버지만유배가풀렸다.12세되던1547년(명종 2)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아버지는 경상 도 영일(迎日)로 유배되었고, 맏형은 이 때 장류(杖流) 도중 에 32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 시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생활을하였다. 1551년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귀양살 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과거에 급 제할 때까지 10년간을 보내게 되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 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 (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李珥)· 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큰 선비들과도 사귀었다. 1 7세에 문화유씨(文化柳氏)와 강항(姜項)과 혼인하여 4남 2녀 의 자녀를 두었다. 25세 때 븮성산별곡븯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성산(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 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 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 갔다.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 다. 이어 좌랑·현감·도사를 지내다가 31세에 정랑·직강·헌납 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에 선출되었다. 이어 수찬·좌 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35세 때 부친상 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하였다. 40세인 1575년(선조 8) 시묘살이 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 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 우거시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사 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으로승진하여조정에나아갔다. 그해11월사간원대사간에제수되나진도군수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관 동별곡>과 <훈민가 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재질을발휘하였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 해 대사헌이 되었 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 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이 때 <사미인곡>·<속 미인곡>등의가사와시조·한시등많은작품을지었다. 54세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 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동인들을추방하였다.다음해좌의정에올랐고인성부 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56세때왕세자책립문제인 건 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 (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 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에 신성 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을 받 고 파직되었다.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진주(晋州) 로 옮기라는 명이 내린 지 사흘 만에 또다시 강계(江界)로 이 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592년(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 고 의주까지 호종,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 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 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 하였다. 작품으로는 븮성산별곡븯·븮관동별곡븯·븮사미인곡븯·븮속미인곡븯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븮송강별집추록 유사븯(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븮주문답븯(酒問答) 3수, 븮훈민 가븯 16수, 븮단가잡편븯(短歌雜篇) 32수, 븮성은가븯(聖恩歌) 2수, 븮속전지연가븯(俗傳紙鳶歌) 1수, 븮서하당벽오가븯(棲霞堂碧梧 歌) 1수, 븮장진주사븯(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 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 븮송강가사 븯(松江歌辭)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그의 작품세계 는 대체적으로 애군(愛君)·애민(愛民)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이 외에도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작 품, 강호 산수의 자연미를 노래한 작품이 있다. 그리고 선취 (仙趣)적 기풍과 풍류적 호방함을 담아낸 작품 등 폭넓은 사 대부의정신세계를보여주고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븮송강집븯과 시가 작품집인 븮송강가사븯가 있다. 전자는 1894년(고종 31)에 간행한 것이 전한다.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城本)·관북본(關北 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다.그 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 다.필사본으로는 븮송강별집추록유사븯와 븮문청공유사븯(文淸公 遺詞)가 있다. 한시를 주로 실은 븮서하당유고븯(棲霞堂遺稿) 2 권 1책도 판각본으로 전한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 서원(烏川書院)별사에제향되었다.시호는문청(文淸)이다. 5)홍천경(洪千璟,1553∼163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군옥(群玉), 호 는반항당(盤恒堂).아버지는응복(應福)이다.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고경명(高敬命)의 문하에서 배워유학에조예가깊고,충의의정신이강하였다.1592년(선 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창의사 (倡義使)김천일(金千鎰)의 진중으로나가군량의수집,수송 등의임무를담당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문 서를 관장하고, 의병모집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1609년(광해 군 1)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전적·나주교수·남원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 었다.월정서원(月井書院)에제향되었다. (참고문헌:노안면지) 뱚서원탐방 월정서원(月井書院) 서원전경-맨 뒤편사우가 비가샌지천막으로 수년째덮여 있어향토문화유적 관리에민낯을본 듯아쉽다. 월정서원강당 祠宇 월정사(月井祠) 뱚뱚배향인물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