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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3월31일 화요일 2 (제159호) 기 획 제사란 선조가 돌아가신 날을 맞이하여 추모의 정을 잊지 못하고 또 생시에 봉양이 미진했던 불효의 마음을 사죄하는 추 도 ( 追 悼 )의 의 식 이 라 할 수 있 다 . 그 러 나 의 례 ( 儀 禮 )가 그 리 복 잡 함 이 없 음 에 도 불 구 하 고 잘 지 켜 지 지 않 고 있 음 은 형 식이 필요하며, 또 음식(제수)을 마련하는가에 대해서 생각 해볼필요가있다. 유교의 제사는 븮살아생전에 효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돌아 가신 후에라도 다한다(祭卽盡未盡之孝)븯라 했고, 특히 우리 의 제사는 븮내몸이 다하도록 섬긴다(終身之孝)븯라고 생각하 는 것이다.명심보감(明心寶鑑)에 내가 부모에게효도하면내 자식이 또한 나에게 효도할 것이니 내가 이미 효도를 못했다 면 내 자식이 어찌 나에게 효도를 하겠느냐븯라고 했다. 즉 효 는궁극적으로자기를위하는것이다. 1)제사는효의연장이다. 부모는자식을낳아주고키워주고죽을때는재산까지물려 준다. 그래서 그 부모로부터 싫든 좋든 운명적으로 은혜를 입 게되고자식은그은혜에대한빚을지고있다. 이와 같은 부채가 없더라도 길러준 붐에 대한 정과 사랑이 있기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잊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사회적 도덕과 윤리의 바탕위에서 효(孝)라는 기본사 상이생긴 것이다.효는자식이부모에대한해야할의무이다. 그러면어떤방식으로보답해야할것인가. 첫째는 부모가 자기를 낳아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자기도 자식을 낳아서 대(代)를 끊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것은부모에대한큰불효이다. 둘째로 자식은 부모를 봉양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부모가 자기를낳아주고길러준것에대한갚음이다. 셋째 살아계실 때 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부모를 모실 의무 가있다.그것은곧제사이다.이것은단순한조상숭배에그치 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도덕이고 의무이다. 유교적 이 념에따라조상은신(神)이아니고살아있는부모의연장이라 는생각이다.따라서제사는효도의연장이라할수있다. 조상숭배는 세대(世代)간에 생기는 갈등을 해결해주는 하 나의 방법이다. 즉 부모는 자식에게 가진 것을 물려주고 죽음 의 세계로 가야하는 안타까움, 자식은 부모봉양에 의무를 행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의 부담이 있다.그러므로 조상과 자 손은 제사라는 의식을 통해서 연결된다. 그뿐 아니라 제사는 자손들 상호간의 결속을 강화하는 데에 대단한 기능을 갖고 있다.즉 제사라는 의례를 통해서 종적인 조상과 자손,횡적인 자손과자손을종행으로연결하고있는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사에 자손들이 모이면 먹을 것이 있어야 한 다.이를위해서제수라는명목을빌어조상을대접학난후음 복을하는것으로생각된다. 2)제사는신앙(信仰)이아니다. 조상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고 효(孝)의 대상일 뿐이다. 따 라서제사를산사람모시득하는것이다. 죽은사람을숭배한다는점에서넓은뜻의종교범위에들기 는 하지만 관념적으로는 사자에 대한 추모에 불과하다. 그렇 다면 과연 제사를 추모로 볼것인가. 아니면 신앙(信仰) 의례 (儀禮)로 볼 것인가 라는 점이 문제가 된다.이것은 곧 제사를 인정하느냐부정하는야의기준이되기때문이다. 기독교(改新敎·天主敎)가 이 땅에 전래되면서 항상 부딪히 는문제가바로이조상숭배문제이다.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조상숭배는 우상숭배라는 것이다.중 국에 기독교가 들어가면서 교회측은 조상숭배를 거부해서는 선교(宣敎)가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선교의 방법으로 조상숭 배를 인정하는 연합주의(聯合主義)정책을폈다.그러나1742 년 로마 교황청이 조상숭배를 인정하는 않는다는 판결을 내 림으로써 제사와 기독교는 정면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 침은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 렇게 상반된 입장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유교나 기독교 모두 부모 생전에 효도하는 데는 일치 한다. 그러나 사후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르다. 즉 유교에서는 부모가 죽은후에도 생전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대접하는 제사 를 지낸다는 것이고, 기독교는 죽은 후에 음식을 차려놓고 제 사를 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죽은 후에 도 혼령은 살아있다. 라는(죽음의 부정) 견해이고, 기독교에 서는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는(죽음의 긍정) 사생관(死生觀) 의 차이라 하겠다. 이것은 기독교가 단순히 제사음식에 대한 부정만이아니고죽은자에대한의례(儀禮)자체를부정하는 것으로 뷺우상숭배 하지 말라뷻는 십계명(十誡命)에 따른 것이 다. 둘째 사후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모두 같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사자(死者)라 할지라도 산사람처럼 욕구를 가질 뿐아니라사람이거처하는가까운곳(사당이나正寢)에신주 로 모셔지면서 제일(祭日), 명절 등에 제사를 받는 존재인데 반해,기독교는사자(死者)가어떤물체에빙의(憑依)하는일 없이 오직 하늘이나 땅 밑으로 멀리 가버리는 존재라고 믿고 있 는 것 이 다 . 이 것 은 인 간 이 죽 어 신 (神 ) 이 될 수 없 다 는 유 교 사상과 죽은 사람이 부활(復活)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인격신 (人格神)이 될 수 있 다 는 기 독 교 사 상 의 대 립 이 라 고 할 수 있 다.그렇다고 해서 인간 모두가 신이 된다는 것은 아니고 오직 한사람만이신이 되었다는유일신(唯一神)사상이다.이점에 서두종교간극단대립된다. 유교에서는 생(生)가 사(死)를 하나의 차원에서 연속적인 것으로 보며, 기독교에서는 생과 사를 불연속적인 상이(相 異)한 차원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생사관계에 유교는 일 원적(一元的) 사상이고, 기독교는 이원적(二元的) 사상이라 고 할 수 있 다 . 셋째 유교의 제사 조직은 바로 친족조직이며 제사 사상은 인간들에 제집단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교는 윤 리(倫理)대 신앙(信仰) 세속(世俗)대 신성(神聖)의 대립이 라 할 수 있다.그러므로 유교의 입장에서 기독교는 불효라 볼 수 있고,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유교는 미신이라 볼수 있었 던 것 이 다 . 3)한일(韓日)두나라의조상숭배 한·일두나라의조상숭배는어떻게다른가? 가장두드러진차이점은한국이유교의영향이큰데비하여 일본은 불교의 영향이 크다. 즉 한국(유교)에서는 4대 봉사 (奉祀)라 하여 고조부모까지 기제사를 모시고, 일본(불교)에 서는사망후33주기(周期)까지 제사를지낸다.유교에서 말하 는 4대봉사는 보통 20년을 한 세대로 본다면 10세의 어린아이 가 30세의 부모,50세의 조부모,70세의 증조부모 90세의 고조 부모까지 기억할 수 있는 최장기간을 제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할수있을있다. 그러나불교의33주기는예컨대30대의사람이33년간부모 제사를 지내게 되면 머지않아 자기가 죽어 제사를 받을 순서 에이른다.즉유교에서는자신이기억할수있는최고세대까 지 소급하여 지내지만 불교에서는 자기가 살아있는 생전에 지낸다는것이다. 4)교황청의해석 1742년(영조18) 중국의 전례(典禮) 문제에 관한 로마 교황 청의 명령을 엄하게 지키면서 우리나라 천주교에서도 제사 부정의 운동이 일게 되었다.그러나 1939년 12월 18일 로마 교 황 피우스 12세가 교서를 통해서 뷺유교의 조상숭배는 하나의 시민의식일 뿐 종교적 의식은 아니다뷻라고 선언하면서부터 양가간의 마찰을 끝이 났다.그리고 1965년부터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회(公會)에서도 전통적인 의식을 용납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개신교(改新敎)에서는 아직도 조상숭배를 부 정하고 있다. 그래서 유교와 개신교의 마찰은 아직도 계속되 고있는것이다.(이상대보사발행‘예절상식’에서옮김) [머리말] 경남 김해 김수로왕을모신 숭선전은 1878년 전(前)김해부 사 대호군(大護軍)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수로왕의 납릉 (納陵)을 관리하고 제향을 받듦에 신라시조대왕(휘 赫居世), 기자(箕子), 동명성왕(東明聖王), 왕건(王建), 태조 등 다른 건국주의예와동일하게해줄것을상소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경주 숭덕전의 예에 따라 행하라는 윤허 가 경상도 관찰사를 통해 전달된바 있으며, 이보다 앞서 정조 임금은 1792년 봄에 은전을 베푸시어춘추(春秋)의대제와능 감(陵監)의 설치는 오로지 숭령전(崇靈殿, 고조선의 시조 단 군과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위패를 모신곳)과 숭덕전의 예 (例)에 따라 하도록 지시한바 있다.(春秋之享 陵監之設 一依 崇靈崇德之義) 이를 보듯 숭덕전의 제향은 우리나라 전(殿)·릉(陵) 사당 (祠 堂 ) 등 모 든 제 례 의 중 심 에 있 다 할 수 있 음 에 도 숭 덕 전 의 제례의식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전무한 상태에서 그나마 다 행인 것은 지난 2015년 숭덕전역사학회 주관으로 2차에 걸쳐 학술발표회를 가진바 있으나 후손 연구가 뒤따르지 않아 아 쉬움을 남기기도 해 당시 한형주(경희대)교수의 ‘조선시대 숭덕전의제례의식’서언을인용해본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 복한이래잊혀진사람이되었다. 븮고려사븯에는 경상도 지리지에만 박혁거세의 용어가 나올 뿐 여타의 기록에서는 그렇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조 선시대에도마찬가지였다. 단군이 한국인의 유서 깊은 기원과 관련이 있고, 기자가 敎 化를 일으킨 인군이라면 박혁거세는 그렇지 못하고 신라의 한시조신에불과하였다. 조선에들어와민족의식이고취되면서단군과기자,삼국의 시조 및 고려의 시조 등은 사전체제에서 동일하게 중사로 취 급되었다. 그러나 그 중사로서의 취급은 선농, 선잠이나 문선 왕묘와 같은 중사 일반적인 제사와는 그 격을 달리하였고, 거 리가 서울에서 떨어져 있어 직접 친제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아 니었다. 물론 단군과 기자, 동명왕은 평안도에 있음에도 세조가 친 제를 단행한 적이 있었지만, 신라의 시조가 있는 경주는 왕이 직접그지역에다가갈수가없었다. 역대시조로서 하나의 범주로 묶여 있었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가 있는 지역은 제사의 장소 상 각 지역마다 떨어 져 있어 동질성을 갖기 어렵다. 따라서 각 지방의 제사로 합 사,추모될 뿐이었는데,그나마 연산군 대 이후 사람들의 관심 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그 기록은 꾸준히 나와 조선후기 경종 의 시기에 이르러 신라 시조의 묘호를 ‘숭덕’이라고 칭하게 되 었다. 이러한 칭호의 개변 이후 영조와 정조시대의 숭덕전에 대한 관심은 매년 춘추로 제사를 드리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 고,그관심은고종대까지이어졌다. 지금까지 숭덕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과문한 지 개별연구 가 없었다.그렇지만 그 주변의 의례에 대해서 기존 연구는 적 지 않게 나와 있다.과연 그 주변의 의례를 기준으로 숭덕전의 어느 부분까지 추적해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데에는 상당한 의문이 든다.하여튼 본 논문을 쓰는 방향은 다음과 같은 방식 으로진행될것이다. 먼저, 초기부터 븮국조오례의븯까지 이르는 시기를 통하여 숭 의전의제례라는형태를추적해보려고한다. 븮국조오례의븯에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에 대해 상당히 소 홀한 상태이다. 이것이 ‘역대시조’라는 용어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자료가 많지 않았고, 븮세종실록븯오례까지는 그 구체적 인기록이남아있지않기때문일것이다. 둘째로는 신라시조의 경우 ‘숭덕전’라는 형태를 통하여 드 러난경종대이후의상황과그형태이다. 경종대 이후는 영조븡정조 시대로 그나마 관련 자료들이 적 지 않게 남아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그 자료 역시 단편적으로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러한상황은고종대까지계속이어진다. 이상의 한계를 가지고 논문을 구성할 것이다. 물론 지금까 지 충분한 자료를 확보했는가라는 점은 논문을 전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자료의 처리 기술의 미숙함은 여전히엉성하기때문에어려움이많다.향후비정을구한다.】 이와 같이 서언에서도 밝혔듯이 숭덕전의 제례의식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븮국조오례의 븯에 의 하 면 숭 덕 전 의 제 사 를 중 사 (中 祀 )로 지 냈 음 을 알 수 있 음에도 중사의 진설방식(10변10두)에서 벗어나 8변 8두를 진 설하고 있어 이 또한 우리 성손들의 숙제(宿題)라 할 것이다. 또한 경주의 신라문화원에서 신라의 복식을 연구하면서 아직 제사에입었던복식은밝혀내지못했다. 이는숭덕전의제향이경종대에이르러관찰사로하여금제 례를 주관케 함으로서 금관조복이 처음 등장했을 것으로 추 정하고 있으나 그 이전 제복(祭服)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 어이또한고증을통해밝혀지기를기대해본다. /다음호에는 숭덕전의제수와 상차림 종묘제향을 소개합니 다. 祭 儀 모선재시향모습. 享朝鮮檀君儀 享高麗始祖儀 享歷代始祖儀 준 비 절 차 시일 뱚중춘 중추 상순 좌동 좌동 재계 뱚산재3일,치재2일(1일향소) 좌동 좌동 진설 ①제향2일전부터유사가청소,막차,찬만 설치. ②음복위,문외위설치.예감,망예위설치. ③향일축판,향로,향합,폐비,제기,찬구설치. 변10,두10, 보궤 등.관세,작세등설치. ① 좌동 ② 좌동 ③ 좌동 ④향일축판을고려시조,현왕, 공민왕의신위의오른편에놓음.나머지동일 ①②③ 묘 사 및 알 자 등이 시행할뿐 나머지는동일함 ④ 는 없음 생성기 제향 1일전 포시 이 후 헌관 이 희 생을 살핌. 양, 돼지 각 1마리 좌동 좌동 전향축 1일전승지가외정에서전달 행 례 절 차 행례준비 ①축전5각장찬자가찬구를담고진설을 點時함. ②축전3각헌관 이하 문외위로 나감. ③축전1각집사자가작을씻고닦아 점(弱)위에놓음. 좌동 좌동 전폐례 ①헌관四拜→헌관에게請行使 ②三上香→獻幣하여신위에게올림→ 執笏 뮐 伏興→復位 ① 좌동 ②삼상향→헌폐→집홀면복흥→복위 →현왕과 공민왕에대해의례시행 ①청행사→四拜 ②신위에三上香→奠幣→ 俯伏興平身→復位 초헌례 ①집사자가술잔을헌관에게드려신위전앞에 올림(예제) ②축이 신위의오른쪽에서축문을읽음→ 뮐 伏興→ 復位 ①집사자가술잔을고려시조전앞에 나가올림 ② 좌동 ③집사자가배위의현왕,공민왕신위전앞에 행례함 ①신위에전작→俯伏興 ②신위오른쪽에서축문 읽음→俯伏興平身→復位 ※ 술 은 예제 아헌례 집사자가술잔을헌관에드려신위전앞에 올림( 왑齊)→執笏뮐 伏興→復位 ①집사자가헌관에게술잔을드림(앙제) ②현왕과 공민왕에게부제를드림(앙제) 신위에전작→俯伏興平身 →復位 ※술은앙제 종헌례 뱚아헌례의동일 뱚아헌례의동일 음복수조 뇌에서복주,신위전에서조육을가져옴→ 음복위에서음복븡수조→執笏뮐 伏興→復位 고려시조의뇌에서복주,신위전에서조육을 가져옴→음복위에서음복븡수조→ 執笏뮐 伏興→復位 뇌에서 복 주, 신위의 조육 가져옴→음복위에서 음복븡수조 뱚→알자執笏 俯伏興平身→復位 철변두 再拜→徹 븅豆→四拜 좌동 四拜→徹 븅豆→四拜 망예 헌관이 望燎位에서시행 좌동 좌동 예필 뱚白禮畢→헌관퇴장 좌동 좌동 납신 축과 집사四拜→찬창,찬례四拜 →집사자예찬거두고합호함 좌동 축과 집사 사배→축 이하 사배 →장찬자예찬을거두고합호함 뱚븮세종실록븯오례와븮국조오례의븯의단군,고려시조및역대시조의 제향 ※븮세종실록븯권131길례의식및븮국조오례의븯권2길례향역대시조의제향 뱚제사의참뜻 뱚숭덕전의제사의식 제의(祭儀)라 함은 제사와 의식을 말한다. 제례 는 그 유래나 절차 등을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강장신선한것으로우리의전통문화라고할수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 제 점 중 하 나 는 예 절 의 붕 괴 라 할 수 있 다. 이는 아마도 전통예절을 겉치레 또는 불편 한의식으로인식하다보니가정마다간소화하 자는 의견이 분분하면서 우리의 전통예절마저 무너져 내린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진단해 본 다. 예로초등학교입학하기전한글을배울때족보 를 가르치고 예절을 가르쳤더니 장성해서 조상 의제사에먼저진설을하고도포를입고유건을 쓰는 등 스스로 알아서 하더라는 예기를 한다. 이는 어려서부터 생활화하였기 때문으로 우리 의전통문화는우리에게있어가장편하고아름 다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를 부정하고 ‘요즈음시대에?’라며반문하고간소화하면서 예법은 무너지고 가장 불편한 존재가 된 것이 다. 그리고 최근에는 각 문중의제례가 집행부가 바 뀔 때마다 변한다는 말이 있다. 제사 날짜를 갑 자기 바꿔버리기도 하고 시간을 마음대로 늦추 는사례도있어먼거리에서추원보본의정성으 로참례키위해오는후손들이제례에참례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에 본보에서는 이번호부터 제의(祭儀)를 다루면서 먼저 제사에 임하는 참뜻,숭덕전의제사의식과 우리나라 전(殿)·서원(書院)을 비롯한 각 문중 의의식을차례대로소개하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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