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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3월31일 화요일 12 (제159호) 기획 선비가위태하고어지럽고 어려움에 처함에 능히곧은도(道)로써굴하지않고옥처럼 깨끗하게지켜 땅을 굽 어보고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부끄러움이 없이수연(粹然,꾸밈이없이의젓하고솔직하게)히 한 결 같 이 도 의 ( 道 義 ) 에 나아가기는더욱어려운데,지족당 선생은그렇게하신분이다.선생(公)께서 는마침이륜(彛倫,倫理)이어두워지는때를당하여만번의죽음을무릅쓰고한마디말을내니군소배(群小輩 )들이노리어마침내십년동안폐고(廢錮) 되었다.거센물결에지주(砥柱,난세에의연히절개를지킨선비)가되어더럽힘이없었으니『군자답도다.저 사람이여』라할만하다. 公은학식이넓고지조(志操)가정대(正大)하여몸가짐은충효스러워정성을다하였고,벼슬에올라서는충심 으로아뢰고극진히하여지극한행실로 다 스렸다.백성을다스림에는아픈사람을보호하듯이하였고,난(亂)에임하고군사를훈련함에는항상넉넉하 게비축하여진을치고병영에나아가가게 하였다.문학을숭상하여일으키고당대에이름을드러내어풍운(風雲)이모이고고기와물이만난듯융성하 였다.공(公)은한강정선생을스승으로 섬 겨도(道)를들음이가장일찍었다.때문에임금을바른길로인도하고착한자를도와보호하여그명성(名聲) 을이루어빛나고밝은데다위대하고우뚝 하여뭇사람과달랐으니이어찌한때에힘쓴다고이룰수있었겠는가.공(公)께서지은문장은충담(忠膽)하 고청아하여애연히뭇대가들과더부름이 있다.이상은前규장각제학조종필선생이지족당선생을평가한글이다. 이처럼선생은스스로분수를지켜만족할줄을알아야한다며지족(知足)을자호(自號)하여맑고깨끗한선비 로평가되면서나스스로오직만족(滿足) 함을안다는오유지족(吾唯知足)의삶을살아와물진만능의이시대에선생의삶이더욱돋보이고,만년에낙 향하여지은농월정과후학들을길러낸서 당이국민관광지로부상하고있어소개해본다. 선생(公)의 휘는 명부(明 뻘)자(字)는 여승(汝 昇)이며 밀성인 박언부의 후손이다. 8세조 휘 영 균은 고려조에 벼슬하여 은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7세조 휘 천경은 조선조 에 들어와 중정대부 전객령으로 밀성군에 봉해지 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6세조 휘 부(敷)는 호 용위 대호군으로 밀성군의 봉호가 세습되고 시호 는 문정(文貞)이다.5세조 휘 윤이(允利)는 행 통 정대부 옥구진 병바절제사로 보국숭록대부 의정 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호는 양심정(養心亭)이다. 고조 휘 기(機)는 행 충무위 부사직으로 의정부 좌참찬에추증되었다. 증조 휘 승숙(承淑)은 충순위 여절교위로 목사 정종아(鄭從雅)의 아들인 별좌 옥견(玉堅)의 따 님에게 장가들어 진주에서 안음에 정착하게 되었 으며,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에 추증되었다. 조 부 휘 덕형(德馨)은 봉정대부 행 함안훈도로 통 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 다. 아버지 휘 형( )은 품성이 진순하고 집안 에서 효도하고 우애하였으며, 행 제용감 봉사로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문화류 씨는 판관에 추증된 휘 희필(希畢)의 따님으로 고려 대승(大丞) 차달(車達)의 후손 영의정 량 (亮)과 판윤 경생(京生)이 곧 6세와 5세조이다. 부인되고 어머니 됨에 아녀자로의 법도를 따랐으 며 정부인에 추증되었다.3세가 추증의 은혜를 입 은 것 은 모 두 공 의 귀 함 으 로 인 해 서 다 . 선생(公)은 융경 5년(1571년) 11월 11일 기사 (己巳)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로 총명함이 드러났으며 기억력이 남다르게 뛰어나 번 거 롭 게 독 촉 하 지 않 아 도 8 ~ 9 세 에 이 미 남 을 놀 라게 하는 말솜씨가 있었고, 이로부터 시문에 두 루 힘써 붓을 들면 문장이 이루어지니 명성이 매 우 자자하였다. 괸찰사가 현에 들어와 불러 보고 지극히 감탄하고 당시 진주목사 최 공(公) 립 ( 몬)이 문장으로 세상에 드러났으므로 학문을 하 게 부탁하였다. 공이 사람의 자식으로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것은 과거만한 것이 없다하고 마침 내 과거공부에 전심하여 만력 경인년(1590) 증광 시에 뽑혔다. 남이공(南以恭)이 장원한 병과에 급제하였으며, 월사 이정귀(李廷龜)와는 동년이 다. 공에게 시를 지어 주었는데 『경인년 우리가 치른 과거 성대하다. 일컫는데 합격한 40인 중 그 대가장젊은나이였지』라는구절이있다. 교서관 부정자에 임명되어 저작과 박사를 역임 하고 정유년(1597)에 예에 의하여 성균관 전적에 옮겨졌다.기해년(1599)여름에호조좌랑에제수되 고가을에해주판관에제수되었으며,경자년(1600) 봄 에 조정 의 명으 로 명나 라 장수 를 접반 할 때 사명 을 받들어 승차되고 예빈시 첨정을 겸하였다. 신축 년 (1601) 봄에 목사 와 마음 이 맞지 않아 관 직을 버 리고 돌아오려 하니 해주 백성들이 관아를 지키고 길 을 막아 한 달 이 넘어 서야 고향에 돌아 왔다 . 계묘년(1603)에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 살이 하 고, 을사년(1605)에 복을 마쳤다. 병오년(1606) 겨 울에 거산도찰방에 제수되고 정미년(1607)에 대부 인(어머니)을 뵈려 고향에 돌아왔다가 마침내 다 시 부 임하 지 않았 다. 무 신년 (1608) 봄에 연서 도찰 방에제수되고,여름에벼슬이갈리었다. 기유년(1609)에 합천군수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합천군은 흉악한 무리들의 횡포가 거세였으나 공 은 다 스림 에 흔들 리지 않 고 청탁 을 들어 줌 없이 공 정 하게 처리 하니 마 침내 그 당 (黨)에 서 음해 하여 중도에 파직되었다. 겨울에 공조정랑에 제수되고 신해년(1611)봄에 고부군수에 제수되어 부임한지 몇달되지않아일이있어파직되었다. 집아 돌아오는 길에 완산(完山)에서 어머님이 병으로 돌아가시니 공은 길에서 일을 당하여 스 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가슴치고 통곡하며 애간 장이 끊어졌다. 비록 밤새도록 폭우가 쏟아져 옷 이 젖어도 상여 곁을 떠나지 않으니 길가에 늘어 서 보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으 며, 방백 정경세(鄭經世)의 도움에 힘입어 돌아 올 수 있었다.계축년에 복을 마치고 집에 있었다. 당시 광해군의 정사가 어지러워 형제를 죽이고 모후(母后)를 유폐(幽廢)하자 공이 직분을 넘어 감히 말하고자 하였으니 드러내지 못하였다. 동 계 정온이 항거의 상소를 올려 노여움을 사 섬에 안치되었는데 영남의 유생들이 창의하여 규혼 (叫 , 억울한 일을 대궐 문 앞에 나아가 하소연 하는 것)하려 하였으나 상소를 가진 자들이 화가 두려워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 공이 분노하여 글을 지어 여러 읍에 알리고 소를 멈춘 유생들의 죄를 성토함이 있는데 이르기를 『지난번의 상소 는 정(鄭) 사직의 처지를 위해서가 아니다. 강상 (綱常)을 바로잡고 시비를 밝힘은 하늘에 마땅하 여예로부터민멸하지못하는것이다.』하였다. 음흉한 무리들이 이것을 없는 죄를 얽어 거의 헤 아릴 수 없는 위기에 빠져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삭제되고 마침내 고향에 돌아와 두문불 출 하였다. 당시 전(田)옹 계로(溪老)와 한가롭게 지내며세월을보낸것이거의10년이었다. 천계계해년(1623)인조반정으로홍문관교리지 제교로 불렀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여름 에 대구부사에 제수되어 대신들이 공의 재간이면 군량 을 운반 하는 임 무에 마 땅하 다고 천 거하 여 마 침내 당상관(堂上官)의 품계에 오르고 원수부 관 향사로 본래 관직을 겸하였다. 갑자년(1624) 봄에 일이 있어 사면되어 돌아오고, 겨울에 죽산부사에 제수되었다. 죽산은 서울을 돕는 요충지인데 혹독 한 병화를 만나 물력이 쇠잔하고 교우(校宇, 향교) 도 아직 다 시 세우 지 못하 여 고을 선 비들 이 의지 할 곳이 없었다. 공이 부임하여 애통해하고 가슴아파 하며 재물을 모아 묘우(廟宇)를 짓고 몸소 석전(釋 奠)을 거행하여 제생(諸生)을 이끌고 제사의 의식 을 행하 였다 . 또 한 그 중 뛰 어난 자 를 선발 하여 항 상 향교 재사에 모아 과업을 엄히 하고 장려하니 이에 예의가갖추어지고인재가점점떨치고일어났다. 병인년(1626) 겨울에 이조에서 계를 올려 제주 도는 중요한 진영으로 모름지기 마땅한 사람을 얻어 다스리게 해야 한다며 마침내 제주목사로 천거하여제수되었다. 죽산 백성들이 추모하여 비석을 세우고 학문을 일으켜 교양한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정묘년(1 627)에 제주도에 부임하여 군기를 손질하여 완전 하게 하였으므로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 받았 다. 숭정 기사년(1629) 봄에 병으로 사직을 청하 고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 형조참의에 제수되어 대 권(임금)에 나아가 사은하고 사직을 아뢰고 돌 아왔다. 겨울에 울산부사에 제수되었다. 부의 관 사가 비좁고 허물어져 공이 곧 계획을 세워 관사 를 중창하고 객관을 수리하니 백성들이 다투어 일을 하여 공사가 몇 개월 만에 마무리 되었다.신 미년(1631) 겨울에 일로 파직되어 돌아오니 고을 백성들이또한비석을세워잊지않았다. 갑술년(1634) 가을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어 좌· 우부승지를 역임하고 을해년(1635)여름에 이조에 서 계를 올려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병자년 (1636) 여름에 만기가 되어 조정에 들어가지 않았 는데 특별히 예조참판에 제수하고 가선으로 품계 를 올 렸는 데 조정 의 의논 이 순박 하여 화려 함이 없 고 또 이력 이 없 는 것이 단점 이라 하자 임 금께 서 답 하기를『이사람은진실순박하고옛것을좋아하여 겉 을 꾸미 는 것 을 일 삼지 않 기에 내 그 사 람됨 을 아 름 답게 여 겨 이에 선 발함 이 있으 니 그 대들 은 괴이 하 게 여기 지 말 라.』하 였다 . 공은 소를 올려 적 극 사 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가을 체직을 청하니 묘소에분황(焚黃)의명을받고겨울에돌아왔다. 조정이 큰 난리를 만나 산반(散班, 散官)으로 남한산성에 어가를 호종하였다. 정축년(1637) 봄 에 어가를 따라 산성을 나와 극언으로 상소하여 당무(黨務)의급한것을올렸다. 장례원 판결사에 제수되고 여름에 가의대부로 품 계가올려지고,호조참판겸도총부부총관에옮겨졌 다.무인년(1638)봄에 다시 예조참판에 제수되고 한 성부좌윤 겸 동지의금부사에 옮겨지니 조정에서 또 트집 잡는 자가 있자 왕께서 답하시기를 『이 사람은 순박하고 삼가며 조금도 세속에 물들지 않아 도승지 로제수하니불가하다하지말라.』하였다. 공이 또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 다. 형조참판에 옮겨지고 겨울에 강릉부사에 제수 되었다.기묘년가을에병환으로누우시어8월11일 에관아에서돌아가시니향년69세였다.9월25일에 아들 이점(爾點)이 상여를 받들어 집에 돌아왔다. 부음이 임금께 들리자 매우 슬퍼하시고 10월 15일 에 예관을 보내어 조제(弔祭)하였다. 11월 25일 현 의 북 쪽 판 흘동 해좌 (亥坐)의 둔 덕에 장례 지냈 으 니 선 조의 묘 소를 따른 것 이다 . 공 의 부 인은 상 주김 씨형조참판양지의따님이다.병조정랑 수돈과 한 산군수염은곧증조와조부가된다. 선생(公)은 일찍 이 한 강 정 구 선 생 을 섬 겨 성 리 학 의 지결(旨訣)을 전수 받 았 으 므 로 비 록 갑 작 스 런 변 고 가 있는 가운데도 법 도를 어기지 않고 뜻을 세움이 탁월 하였다. 공의 풍채 는 너그럽고 온화 하여 따뜻한 봄날 과 같 고 마 음 둠 은 자 상 하 여 어 질 고 너그러워 집안의 종들을 일찍이 꾸짖거나 매질함 이 없 었 다 . 어버이 섬김을 스스로 알았으나 자신의 양생(養 生)은부족하였고,장례의 준비에는정성을 다하였 으며 조 상을 추 모하 는 예는 더 욱 지극 히 하고 삼 가 깨끗이 하였다. 남을 접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경계 를 드러내지 않았고, 서책과 필찰(筆札) 외에는 좋 아하는 것이 없었다. 사학(史學)에 조예가 깊었고 정사(政事)를 잘 하였으며,책력과 법령과 산수(算 數) 등은 꿰 뚫지 않 음이 없고 , 항상 옛 법과 옛 예가 지금에회복되지않음을부끄러워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 임금을 섬김에는 속이 없었고 청렴하고 관대하고 간편하여 다스림에는 백성을 소생시키고 병폐를 없애는 것을 본령으로 삼았 고, 학문을 다스림에는 백성을 소생시키고 병폐 를 없애는 것을 본령으로 삼았고, 학문을 일으키 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급선무로 하였다. 송사 를 듣고 죄를 다스림에 공평하고 공정함을 표준 으로 삼아 비록 뇌물을 주어 청탁하며 두루 거슬 러 비방하고 헐뜯더라도 보고 얻어 이미 정하여 지면 마침내 흔들림이 없었다. 평생 음식은 소박 하였는데 하루는 관리를 꾸짖어 항상 선비는 나 물죽을 먹을 때를 생각한다며 이르기를 『내 다행 히 가난함에서 일어나 나라의 두터운 은혜로 이 녹과 지위를 받아 분수에 넘치니, 땔나무하고 물 을 지는 노고를 면하는 것으로 족하다. 감히 입에 맞고 배부름을 꾀하겠는가.』하였다. 벼슬에 오른 지 50년에 일곱 고을을 다스려도 털끝만큼도 재 물을가까이함이없었다. 부 인 의 전 지 가 단 성 (丹 城 )에 있 어 자 못 넉 넉 하 였으나 조그만 재물도 또한 처리한 것이 없으며, 사는 집은 보잘 것 없어 비바람을 막지 못했고,벼 슬에서 물러났을 때는 사방에 벽만 덩그럴 뿐이 어서 집안 식구들은 항상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 지 못 했 다 . 늘그막에 총애가 융숭(隆崇)하였는데 옛 사람 의 목숨을 다하는 의리를 가슴에 품고 분주히 고 삐잡고 두루 다니며 밤낮으로 힘쓰고 항상 이르 기를 『내 치사(致仕)의 나이가 되어 임금을 섬기 는 날이 짧다. 시대가 망극함을 만났으니 나라를 헤아릴 재주는 없으나 마땅히 힘을 다하여 신명 을 다 바치고, 수령으로 역임하여 동서로 분주히 다니며 감히 수고로움을 말하지 않아야 거의 성 은(聖恩)에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는 것이다.』 하 였다. 승정원에 있을 때 일찍이 하루도 병을 핑계 하지 않았고, 남들은 그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하 였을것이나공은느긋한듯이하였다. 강릉에 수령이 되어서는 연이은 흉년으로 공사 (公私)가 비로 쓴 듯 매우 가 난하 고 고 을 전체 가 굶 주려서로바라보고만있었다,공이보고듣고는말 을잇지못하고오래도록굶주리고말하기를『어찌 남의소와양을받아서그죽어가는것을보는데편 안하고배부름을누릴수있겠는가.』하고이로부터 긴긴여름동안관아의요리를줄이게하였고,낮에 연기나는것은차나죽을쑤는것일뿐이었다.남들 은그검소함을견딜수없었을것이나공은편안듯 이 하였다. 공의 자호는 지족(知足) 또는 영치(嶺 痴)이다. 이는 스스로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을 알 아야 한다는 것으로 삶을 경계한 것으로 지금의 물 질만능주의에본보기가된듯하다. 선생의 생애는 스스로 오직 만족(滿足)함을 안 다는 오유지족(吾唯知足)의 삶을 살아와 물질 만 능 의 이 시 대 에 선 생 의 삶 이 더 욱 빛 이 날 뿐 만 아 니라 애민정신과 선비정신이 요구되는 공직자 사 회에 잔잔한 파동이 되어 아름다운 사회 정직한 국가가되길소망해본다. 농월정은 이름에서부터 남다르다. 밝은 달을 볼 적에 연못위에 비친 밝은 달을 유세객들이 개 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혓바닥을 놀렸던 것과 달 리 사 심 없 이 천 하 를 위 해 유 세 한 은 자 인 노 중 련 으로 본 것으로 선생의 삶이 배어난 듯 하고, ‘달 을 가 지 고 논 다 ’ 는 뜻 은 아 름 다 운 풍 광 에 서 선 비 들의 삶을 비유한 듯 하고,밝은 달빛과 같은 公의 절의정신에서따온듯하다. 농월정은 지족당 박명부(知足堂 朴明뻘)선생이 병자호란때남한산성에서왕의행차를호위하였는 데 , 강 화조 약이 체 결되 어 어 찌할 수 없 게 되 어 관직 에 서 물러 나 낙 향하 여 1637년 9월 에 월 연암 (月淵 巖) 위에 지은 정자로, 그의 족적이 정자 오른쪽에 비 스듬 히 누운 바 위에 정 연하 고 힘 있게 새 겨진 글 씨에묻어나 있다.후세 사람들이 그의덕을 기리기 위하여농월정앞바위에븮지족당장구지소븯(知足堂 杖 之所:지족당이산책하던곳)라는글을새겨놓 았는데,바로선생의발자취가있다는의미이다. 함양은 빼어난 경치만큼이나 누각과 정자가 많 은 지역으로 농월정은 그 대표적인 정자로 손꼽 인다. 농월정은 뒤쪽 가운데에 한 칸짜리 바람막 이 작은방을 둔 정면 3칸,측면 2칸 누각으로 팔작 지붕이며 추녀 네 귀에 활주를 세웠다. 걸터앉거 나 기댈 수 있도록 세 면에다 계자난간을 둘렀다. 바람이 소슬한 가을날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서 있노라면싱그러운소나무내음이밀려온다. 농월정은 2003년 화재로 불탔는데 소실 당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 10여 년 넘게 복원 되지 못하다가 필지 소유자인 박 씨 문 중 의 협 조 로 2015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계자난간(鷄子欄干) - 조선시대에 널리 쓰이 던 난간으로 계자다리(鷄子多里)가 난간대를 지 지하도록 만든 난간을 말하는 것으로 계자다리라 는부재가사용된난간을가리킨다. 계자다리는 측면에서 보면 선반 까치발처럼 생 겼는데 판재에 당초문양을 조각해 만든다. 계자 난간은 위로 올라갈수록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만 들기 때문에 난간대가 밖으로 튀어나오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건물 안쪽에서는 난간대가 손에스치지않는여유있는난간이다. 광난간은 걷거나 움직이는 동선의 공간에 이용 되는 반면, 계자난간은 걸터앉거나 기대어 주위 공 간 을 조 망 하 기 위 한 것 이 다 농월교를 건너 농월정 가는 길은 소나무와 여 러잡목이우거져산책하기딱좋은곳이다. 자세가 당당한 농월정은 건립한지 400년이 지난 유서 깊은 정자이나 문화재로 지정이 되지 않았던 2003년 화재로 소실되어 10여 년간 복원이 되지 않 고있다가2015년현재의모습으로복원되었다. /참고문헌지족당선생문집. /글 정리·사진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 anmail.net) 지족당박명부(知足堂朴明 뻘)선생과 농월정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선원세계(先元世系) 농월정전경-빼어난경관에한폭의그림과같다. 지족당고택(맨뒤건물부조묘). 선생의생애(生涯) 종담서당-경남 함양군 안의면 화림리. 지족당 선생의 강학 지소(講學之所) 맺음말 지족당선생신도비. 농월정-안의면화림동계곡. 농월정(弄月亭) 눈내리는겨울풍경이더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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