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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만(李象萬)은 충청남도 홍성(洪城) 사람이다. 1914년 감리교 협성(協成) 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에 감리교의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월 한국독립운동본부(韓國獨立運動本部)의 지령으로 중국 북경(北京)에 파견되어 박정래(朴正來)·조두진(趙斗珍)·유장연(劉璋淵)·전재홍(田在弘)·유중한(柳重韓)·연병주(延秉柱)·최훈식(崔勳植) 등과 더불어 신대한동맹회(新大韓同盟會)를 조직하고 동 회장에는 박정래를 추대하였으며, 그는 동회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어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동년 9월 임정이 중경(重慶)으로 이동 정착하자 동년 10월 의정원 정기의회에 참석하여 제4차 개헌을 단행하게 되자 임정은 집단 지도체제로서 주석(主席) 중심체제로 지도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1941년 9월 회계원검사원으로 선임된 그는 이듬해 10월에는 회계검사원 검사관이 되었으며 임시의정원 의장이던 김붕준(金朋濬)의 탄핵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광복군의 행동준승(行動準繩) 9개항의 취소를 요구하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한 통일된 정국의 방향을 모색하는데 주력하였다. 1943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여 중앙감찰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4년 의정원회의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지도체제를 개편하게 되자 동년 6월에 그는 국무위원 겸 검사원장(檢査院長)이 되어 활약하였으며, 1945년에는 화중구(華中區) 한교선무단장이 되었다. 1946년 임정 주화(駐華)대표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는 대만 한교협회 이사장(韓僑協會理事長)으로 우리교포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안전 귀국 등의 제반 업무를 처리하다가 과로로 인하여 병을 얻고 1949년에 귀국하여 요양 중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