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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상만 선생 공적비 독립운동가 이상만 선생 공적비 독립운동가 이상만 선생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고암리에서 1884년 1월 5일에 출생하였다. 그는 고향인 홍성에서 목회하던 중 1916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고 당진으로 전임하여 목회하던 중 1918년 감리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생하기 직전에 호서지방을 순회하며 3.1독립운동 선전활동을 하였으며, 3.1독립운동 발생 직후에는 조국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직후 북경에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신대한동맹회의 회장이었던 홍성 출신 박정래에게 영입되어 총무로 활동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중국 각 성을 순방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요청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기강에 자리하던 1939년에는 대한민국 충청도 지역 의원으로 선임되어 의정활동에 참여한 가운데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동한 이후 의원으로서 맹활약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1940년 한국 광복군이 창설될 때 총사령부 주계로 임명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행정부에도 참여하여 1940년 내무부 산하에 생계위원회가 설치될 때에는 생계위원, 1943년 생활부가 설치될 때에는 생활위원, 1944년 생계설계위원회가 설치될 때에는 생계설계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1941년에는 회계검사원 검사원, 1942년에는 회계검사원 검사관, 1944년에는 회계검사원 검사원장 및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는 몸담고 있던 한국독립당에서도 1943년 5월 중앙감찰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인 토쿄에 설립된 신한교회 담임목사로도 활동했으며, 1944년 여화한인기독교연합회도 창립하였다. 1945년 조국 광복이 된 후에도 그는 중국에 남아 주화한교선무단의 화중구 한교선무단장으로 임명되어 우리 교포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안전 귀국등의 제반 업무를 처리하다가 국공내전으로 대만에 건너가 1948년에는 대만한교협회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49년 귀국하여 김구 선쟁이 기거하던 경교장에 함꼐 거주하면서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칩거 생활을 하다가 1955년 1월 8일에 소천하였다.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묘역에 안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