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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직선생의 자는 순유요 호는 간정이다. 경주인으로 고종 15년 무인(서기 1878년) 3월 29일 진천에서 일재공 21대손인 진사 이상우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선생은 후덕강직한 성품에 항상 애국애정과 정의감에 불타있었다. 해아밀사 수석대표 이상재의사와는 종형제간으로 서울의 백부 이용우 댁에서 침식과 수학을 같이 하면서 진충보국의 기틀을 다졌다. 고종 41년 을사조약에 의분을 느낀 선생은 국권을 회복하려면 문명인을 양성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고향인 진천에 내려와서 그해 10월 28일 사재를 털어 문명학교를 찰설 역사를 가르치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니 실은 선생은 이 고장 교육의 창시가이며 이 나라 민족개조운동의 선각자이셨다. 그후 1919녀 3.1운동이 터지자 진천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4월 2일 수천명을 동원 질서있게 시위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대가 시위군중에 사격을 가하여 수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주모자였던 선생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후 그 후유증으로 뇌신경에 이상이 생겨 평생을 고생하다가 1944년 8월 18일 조국해방의 감격을 누리지 못한채 타계하셨으니 평생을 국민계도와 독립운동으로 일관하신 선생의 절의와 공적은 영원히 후세에 귀감이 될것이다. 1984년 11월 3일 애국지사 이상직선생 묘비건립 추진위원회 청주원호지원청 진천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