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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연천 항일운동 지 않았다. 물론 연천군 출신인 유인찬(柳仁贊, 1889년생)이 홍범도와 허은 등 산포수 출신의 의병들이 조직한 의군단(義軍團)에 참여하여 서무부원으로 활동하고, 1922년 5월 돈화 방면 의 독립군과 기맥을 통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사실이 확인된다.87) 또 연천군 왕징면 출신 황세균(黃世均)이 1934년 일본 요코하마에 거주하면서 반제가나가와(神奈川)지 구에 속하여 반제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사실도 발견된다.88)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다른 시· 군에 비하면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연천지역의 의병투쟁이 매우 활발하여 연천 출신 의병들의 희생이 컸고, 이에 따라 민족운동의 역량이 약화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연천지역민의 항일독립운동을 기억하기 위한 방안을 몇 가지 제의하고 자 한다. 첫째, 일제강점기 연천 출신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던 분들을 발굴하여 독립유공 자로 포상하는 사업을 진행하였으면 한다. 3·1운동 때 사망한 연천인이 6명이나 되고, 피검 자가 100명이나 된다. 군내에 보관된 제적부와 범죄인명부 등을 조사하여 사망자와 피검자를 확인하고, 이들을 관계기관인 국가보훈처에 추천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될 수 있도록 노력하 기를 제안한다. 둘째, 연천지역의 독립운동 사적지에 대한 조사와 책자의 발간이 있었으면 한다. 기왕에 국가보훈처와 연천군에서 조사한 것은 십여 곳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보다 종합적이고 체계 적인 연천지역 독립운동 사적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셋째, 연천지역에서는 활발한 의병투쟁이 전개되었고, 현장에서 순국한 의병만 해도 100여 명이나 된다. 이들의 성명과 인적사항과 주거지 등을 파악해보고, 그것이 어려우면 순국 현장 에 표지석이라도 세웠으면 한다. 연천 출신으로 순국한 의병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우는 것도 한 방안이라고 생각된다. 넷째, 연천지역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을 학생과 일반인들이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해보기를 제안한다. 학생과 일반인 등이 연천지역의 독립운동사적지를 ‘올레길’을 걷는 것처럼 답사할 수 있는 코스를 개발하고, 주민참여행사를 개최한다면, 연천인의 애향심을 제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87) 「元義軍團員 柳仁贊 및 김성도 체포에 관한 건」(1922.5.10.), í��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의 부-재만주의 부�� 32. 88) 내무성경보국, ��特高月報��, 193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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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유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