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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연천인의 항일독립운동과 그 특징 33 삭녕군에서는 동면 도연리(현 연천군 중면 도연리) 음지촌의 해산물 행상 겸 농민인 원명중 (元明仲, 1884년생, 1909년 26세)이 연기우 의진에 참여하여 1909년 음력 4월 29일 오전 1시경 총을 휴대하고 동면 도연리 이병록(李炳祿)의 집에 들어가 그로부터 군자금 15원을 모집하였다. 동년 동월 15일 오후 10시경 연천군 북면 합수리에 거주하는 한길상(韓吉相)으 로부터 10원을 모집하였다. 이어 그는 동년 8월 12일 정오 12시경 삭녕군 동면 유음리 정동 현종규(玄宗奎)의 집에 가서 그로부터 1원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그는 동년 음력 8월 25일 오후 1시경 삭녕군 인목면 덕산리 최영식(崔永植)의 집에 출동하여 군자금 1원 50전을 모집 하였다. 그리고 동년 음력 9월 20일 오후 8시경 삭녕군 동면 적동산리 이주식(李周植)의 집에 들어가 그로부터 1원 90전을 모집하였다. 그는 동년 9월 27일 오후 11시경 강원도 철원군 신서면 면장 김원백(金元伯)의 집에 가서 “돈을 안내면 군율을 시행한다.”고 위협하여 그로부 터 의류 17점을 모집하였다. 동년 10월 29일 오후 12시경, 삭녕군 동면 어적산리 이승억(李承 億)의 집에 출동하여 군자금 1원 48전을 모집하였다.56) 이 외에 전복규 의진과 윤인순 의진 소속 의병의 활동도 주목된다. 마전군 서면 내곡(현 백학면 석장리 내동) 출신인 양충신(梁忠信, 1891년생, 1907년 17세, 농업)은 1908년 2월 전복규 의진에 참여하여 동지 수 명과 병기를 휴대하고 마전군과 장단군의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장단군 군산면 조원회(趙元會)의 집에서 돼지 1마리, 짚신 20족, 무명 1필을 마련하였다.57) 또, 장단군 고랑포(현 장남면 고랑포리)의 김경록(金景祿, 1880년생, 1908년 29세, 농업)은 1908년 음력 7월경 윤인순 의진에 가입하여 동지 수십 명과 무장하고 파주, 양주, 적성 군내를 횡행하며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1908년 10월경 파주군 파평면 장포리의 일진회원 박순옥(朴舜玉)과 김봉계(金鳳季) 두 사람을 체포하여 고랑포 천천리 산속에서 살 해할 때 부근에서 망을 보았다.58) 장단군 고랑포 출신 신화선(申化善, 1880년생, 1908년 29 세)은 1908년 음력 1, 2월에 의병을 일으킨 심성완(沈聖完) 의진에 참여하여 적성, 고양, 파주 등지를 순회하며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59) 56) 위의 책, 164-165쪽. 이 활동로 체포된 원명중은 1910년 9월 징역 5년을 받았다. 57) 위의 책, 16-18쪽. 이 일로 체포된 양충신은 1908년 11월 징역 5년의 형을 받았다. 58) 위의 책, 56쪽. 59) 위의 책, 45쪽. 이 일로 체포된 신화선은 1908년 9월 유형 7년의 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