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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연천인의 항일독립운동과 그 특징 29 박종한 의진 등은 허위 의진과 긴밀한 협력을 취하고 있었다.40)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 가 조직되었을 때 연천지역에서 활동하던 연기우 의진, 김수민 의진, 김진묵 의진, 김규식 의진 등은 군사장 허위의 직계로 활동하였던 것 같다. 1908년 1월 말 허위가 약 300명의 선봉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약 30리 지점에 진출하였을 때 김규식 의진과 연기우 의진이 허위와 함께 선봉대로 활동하였고 41) , 김수민 의진과 김진묵 의진 등의 의병들은 후원군으로 편재되어 서울로 진공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후, 허위는 가평으로 퇴각하여 적성군 감악산을 근거지로 삼아 임 진강 유역에서 잔여 의병들을 수습하여 1908년 3, 4월경 관동창의원수부를 조직하였다. 이 원수부의 총대장은 허위 또는 김수민이었고, 선봉장은 김교성(金敎盛), 좌군장은 정용대(鄭用 大), 우군장은 윤인순(尹仁淳), 중군장은 이은찬(李殷贊), 참모장은 홍원유(洪元裕) 등이었 다.42) 이처럼 연합조직이 편성되었지만, 허위를 수반으로 하는 의병들은 대규모의 연합작전 보다 지역주민의 도움을 받아 소규모 작전을 전개하였다.43) 이 무렵 연천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으로는 먼저 박종한 의진의 의병이 주목된다. 마전군 서면 내곡(현 백학면 석장리 내동) 출신인 강명선(姜明善, 1871년생, 1908년 30세, 농업)은 1908년 2월 박종한 의진에 참여하여 동지 10여 명과 장단군과 마전군 내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1908년 2월 마전군 미현(현 미산면 아미리에 있었던 마을)에서 주민으로부터 군자 금 6원을 모집하였고, 마전군 서면 최사음(崔舍音) 집에서 곡물 100석을 마련하였다.44) 또, 마전군 서면 묵동(현 백학면 석장리) 출신 김치연(金致淵, 1890년생, 1908년 19세, 농업)은 1908년 2월 박종한 의진에 참여하여 동지 30여 명과 같이 양총을 휴대하고 장단군 내의 마을 에 출동하여 군자를 마련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45) 40) 경기도사편찬위원회, í��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 96-97쪽. 41) 「旺山許蔿先生擧義事實大略」,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0, 243, 795쪽. 이 자료에는 김규식과 연기우가 총탄에 맞았다고 되어 있다. 이 점으로 보아 김규식과 연기우는 허위와 선봉대로서 행동을 같이 한 것으로 판단된다. 42)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 104·105·111·112쪽. 43) 위의 책, 104-109쪽. 4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6-18쪽. 이 활동으로 체포된 강명선은 1908년 11월 징역 15년의 형을 받았다. 45) 위의 책, 16-18쪽. 이 활동으로 체포된 김치연은 1908년 11월 징역 5년의 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