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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연천인의 항일독립운동과 그 특징 27 이후 그는 양주, 파주, 적성 부근에서 조인환(曺仁煥), 권준(權俊), 김진묵 등 100명과 활동하 였다. 왕회종은 김진묵과 함께 9월 11일부터 13일까지 임진강 본류에 위치한 적성, 삭녕, 안협, 토산 등지를 돌면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400여 명의 장정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 하였다. 의병들은 일본의 보병 제51연대 다베(田邊)대위가 인솔하는 보병 1개 중대와 반 소 대, 산포병 1개 소대와 공병 1개 분대의 공격으로 타격을 받고 도피하였다.32) 1907년 10월경 철원에 머무르던 왕회종은 김진묵 등과 일본군 조선주둔군 김화 및 금성수비대의 추격을 피해 경원가도의 동쪽인 춘천, 화천, 양구 등지에 진출하여 활동하였다.33) 연천 출신의 인물 중에는 김수민 의진에 참여한 사람이 다수 있었다. 연천군 서면 소포리 (현 왕징면 강내리) 출신인 유생 전복규(1878년생, 1907년 30세)는 1907년 음력 7월부터 1908 년 음력 9월까지 김수민을 대장으로 하는 의진에 가입하여 좌익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의병 100명 정도를 이끌고 연천군, 마전군, 장단군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과 일제 헌병분견소 습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8년 2월에는 당시 마전군의 마전 헌병분견소를, 동년 3월에는 장단군의 구화장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1908년 2월에는 연천군 북면에 서, 동년 9월에는 마전군 북면에서, 동년 10월에는 연천군 동면에서 일본의 헌병대와 교전하 였다. 또한 연천군, 마전군, 장단군 등지에서 군자금 1,400원을 모집하였고, 1908년 이들 군에 서 생산된 쌀의 1/3을 군량미로 모집하였다.34) 장단군 고랑포 장래정(현 장남면 고랑포리) 출신 김거복(金巨福, 1886년생, 1907년 22세, 농업)도 1907년 음력 10월경 김수민 의진에 가입하여 양근군, 장단군 등지를 횡행하던 중 동월 23일경 장단군 고부성 부근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8년 음력 2월경 장단군 구화장 부근에서 두 번 일본헌 병대와 교전하였다.35) 장단군 장현내면 사루리(현 장남면 판부리 사잠) 출신의 구만성(具萬成, 1884년생, 1907년 24세, 농업)은 1907년 음력 11월경 박종한 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마전군 북면 31) 경기도사편찬위원회, í��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 92쪽. 32) 「폭도사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666쪽. 33) 위의 책, 707쪽. 3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974, 86쪽. 이 활동으로 체포된 전복규는 1909년 2월 유형 15년의 형을 받았다. 35) 위의 책, 49쪽. 이 활동으로 체포된 김거복은 1908년 11월 유형 5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