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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연천인의 항일독립운동과 그 특징 25 기우·지홍윤(池弘允) 등이 주민에게 총기를 나누어 주어 의병을 확충한 후 군수이자 일진회 회원인 정경수(鄭景洙)를 처단하고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고 강화도를 장악하였다. 이에 일본 군이 1개 소대를 강화도에 급파하고, 이어 2개 중대를 증원하여 이들을 수색하고 토벌하였다. 일본군의 수색과 토벌을 피한 강화분견대의 의병 중에서 연기우는 고양군 구파발 흥덕사를 근거지로 삼고 마전·삭녕·연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19) 1907년 10월 2일 김수민은 장단군 강북면 솔랑리에서 기의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개성군 대흥산에서 총기를 확보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여 900명의 의진을 지휘하고 있었다. 특히 김수민은 1907년 10월 27일 의병 200명을 이끌고 장단군 고랑포(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를 습격하여 헌병분견소를 불태웠다.20) 허위는 1907년 8, 9월 연천·적성·양주·파주·이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강화분견대의 연기우 부대를 합류시키고, 강원도 철원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규식 부대도 합 류시켜 전력을 신장하였다.21) 육군 부교(副校)로 육군연성학교에 근무하였던 김규식은 1907년 8월 육군 정위(正尉) 현덕 호(玄德鎬)와 함께 양주 동두천에 머무르던 허위를 찾아가 그와 연계를 맺었다. 그는 40, 50에서 80명의 의병을 이끌고 마전, 삭녕, 연천, 양주, 철원 등지에서 활동하였다.22) 1907년 8월 무렵 김규식 의진은 800여 명에 달하였고, 당시 연천군과 경계가 연접된 철원군 신서면 보개산에 주둔하고 있었다.23) 마전군 강신면 사동(현 왕징면 사동) 출신으로 붓장사를 하던 박종한(1882년생, 1907년 26세)은 1907년 8월 17일 김규식의 권유를 받고 그의 의진에 가입하여 800여 명과 더불어 활동하였다.24) 그리고 마전군 강신면 기곡리(현 왕징면 기곡리) 출신인 고문성(高文成, 1881 년생, 1907년 39세, 농업)은 1907년 음력 8월 26일 박종한 의진에 참여하여 동지 30명과 19) 경기도사편찬위원회, í��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 57·58·87쪽. 20) 위의 책, 89쪽. 21) 이현희, 「허위의 의병투쟁과 서대문형무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9, 2001, 254쪽. 22) 「김규식판결문」(경성공소원, 1908.8.25.). 2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974, 111쪽. 24) 위의 책, 111쪽. 그런데 그는 1909년 6월 14일 장단군 구화장에서 그가 이끄는 의병 17명과 함께 구화장 헌병분견 대에 자수하였다. 이 점이 감안되어 그는 유형 1년의 형을 받았다.